① ② 과거 영랑사의 모습 ③ 고등학생 시절 최동철 이장이 친구들과 함께 고대저수지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 사진은 왼쪽부터 정제남, 이상욱, 김용권, 최동철 이장 ④ 진관리-항곡리 버스노선 개통사진 ⑤ 과거 고대방죽모습 ⑥ 진관리 마을 전경 ⑦ 최동철 진관1리 마을 이장
① ② 과거 영랑사의 모습 ③ 고등학생 시절 최동철 이장이 친구들과 함께 고대저수지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 사진은 왼쪽부터 정제남, 이상욱, 김용권, 최동철 이장 ④ 진관리-항곡리 버스노선 개통사진 ⑤ 과거 고대방죽모습 ⑥ 진관리 마을 전경 ⑦ 최동철 진관1리 마을 이장

<편집자주>

마을을 품고 있는 산과 들, 오랜 세월 이어져 온 지명 속에는 저마다의 유래와 전설, 그리고 잊혀진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그러나 산업화와 도시화 속에 사라진 마을, 농촌 고령화로 전통의 맥이 끊길지 모르는 자연마을들이 늘어나고 있다. 본지는 ‘마을 아카이브 IV - AI 디지털기록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당진지역 마을의 역사·문화·인물·전설·생활사를 기록하는 ‘우리마을이야기’ 마지막 8번째 고대면 진관1리를 소개한다.

※ 이 기사는 2026년 충청남도 지역미디어사업 지원을 받아 취재한 것입니다.

고대면 진관1리는 백제 때 당나라로 통하던 길목에 사신과 행인이 묵던 ‘진관(眞館)’이 있어 붙은 이름이라고 알려진다. 조선시대 상대면에 속했던 진관, 관동, 저동 등 여러 마을이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하나로 묶여 지금의 진관리가 됐다. 고대저수지와 백제 고찰 영랑사를 품고 100년 넘게 이어져 온 이 마을은 최근 고령화와 인구 감소로 빈집이 하나둘 늘고 있다.

당나라 사신 묵던 ‘진관’에서 유래한 이름

기록에 따르면 진관리라는 지명은 백제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나라 사신과 사객, 행인이 오가며 머물던 숙소인 진관이 마을에 있었던 데서 이름이 유래했다.

진관리에는 진관모퉁이, 건너말, 관동, 궁말, 샘골, 성황당, 계수나무골, 통새골, 영파산, 영랑사, 모시울, 뒷골, 덕골, 산수골 등 자연부락 14곳이 있다. 관동은 당나라 사신이 묵던 집이 있었다고 해서 붙은 이름으로 지금은 그 집터가 논으로 변해 ‘당터’라는이름만 남았다. 궁말은 한자로 국촌(菊村)이라 기록됐고, 계수나무골은 한자로 계동(桂洞)이라 적었는데 옛날 산을 지키던 산지기가 살아 ‘산직말’이라고도 불렸다.

얼음 지치고 멱 감던 고대저수지의 추억

진관1리 주민들에게 가장 짙은 추억으로 남은 곳은 지금은 사라진 고대저수지다. 최동철 이장은 “겨울철 등교할때 형들을 따라 교실 난방을 위해 장작을 지고 저수지를 가로 질러갔다”며 “그때는 저수지가 정말 꽁꽁 얼어 동네 친구들과 썰매를 타고 얼음을 지치며 놀았다”고 말했다.

여름이면 저수지 얕은 쪽에서 멱을 감았고, 낚시를 못 하는 친구가 없을 정도로 붕어가 흔했다. 낚시 도구가 귀하던 시절이라 대나무를 꺾어 낚싯대를 만들고 수수깡으로 찌를 대신했지만 씨알 굵은 붕어를 곧잘 낚아 올렸다. 1980년대 들어 가물치가 유입되고 인근에 축사가 생기면서 수질이 나빠져 붕어가 눈에 띄게 줄었다.

고대면지 자료를 보면 고대면 전체에는 하천 54곳이 흐르고 저수지를 낀 세천만 40곳에 이르는데, 그중에서도 고대저수지는 진관1리와 진관2리 주민 모두의 삶과 맞닿아 있던 물줄기였다.

이후 저수지는 매립돼 지금의 운동장이 됐다. 최동철 이장은 “저수지가 막히지 않았다면 저수지를 활용한 새로운 부가가치가 더 많이 생성됐을 것”이라며 마을 친구들이 만날때마다 저수지를 그리워한다고 전했다. 얻은 편의보다 잃은 추억과 기회 비용이 더 크다는 게 마을 주민들의 공통된 정서다. 저수지가 진관1리와 진관2리 경계에 걸쳐 있어 두 마을 모두에 같은 추억을 남겼다는 점도 눈길을 끈다.

바닷물 들던 갯가 마을의 흔적

지금은 내륙 농촌 마을이지만 진관1리 인근에는 한때 바닷물이 들어왔다. 최동철 이장은 “‘송댕이’라고 부르던 갯벌이 있어 바지락과 망둥이, 박하지를 잡으러 다녔다”며 “석문방조제가 생기기 전에는 채운뜰 당진천까지 배가 올라왔다”고 말했다.

배는 15인승 안팎 크기의 작은 배로 그물을 싣고 들어오면 마을 사람들은 배를 수리하고 그물을 손질했다. 방조제 건설로 풍부하던 어자원이 사라졌지만 갯가 마을이었던 흔적은 지명과 옛이야기 속에 여전히 남아 있다.

신작로에서 포장도로로, 두 차례의 큰 변화

최동철 이장이 꼽는 진관1리의 가장 큰 변화는 두 차례다. 첫 번째는 1970년대 초 새마을운동이다. 볏짚으로 덮은 지붕을 함석이나 슬레이트로 바꾸는 지붕 개량이 마을 곳곳에서 이뤄졌다. 두 번째는 1980년대 초 진관1리 앞에 펼쳐진 채운뜰의 경지정리와 도로 포장이다. 그전까지 마을 앞 들판은 큰 길을 중심으로만 어느 정도 반듯했을 뿐 지금 처럼 바둑판식으로 구획되지 않았다. 당진으로 이어지는 신작로는 폭 6m 안팎의 왕복 1차선 수준으로, 비가 오면 진흙탕이 되고 가물면 흙먼지가 날려 수시로 자갈을 부어 메워야 했다.

5일장을 보러 당진장까지 걸어 다니던 기억도 여전히 생생하다. 고대장은 닷새마다 4일에 서는 장이었다. 최 이장은 “비가 오는 날 버스를 기다리다 자리가 없어 몇 대를 그냥 보내고 점심때가 돼서야 당진에 도착한 적도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해주최씨 집성촌과 영랑사, 초파일이면 온 마을이 잔치

고대면은 흔히 손씨 집성촌으로 알려져 있으나 진관리에는 해주최씨와 이씨 등이 뿌리를 내리고 살아왔다. 최 이장은 “어렸을 때만 해도 해주최씨가 20가구 넘게 모여 살았다”고 말했다. 인근 옥현리 일대에도 해주최씨 집성촌이 형성돼 있지만 여기서 파생된 일족이 곳곳으로 퍼져 작은 집성촌을 형성했다.

진관1리 마을 뒷산에는 백제 고찰 영랑사가 있다. 기록을 보면 영랑사는 백제 때 아도화상이 창건했고 고려 선종 8년(1091) 대각국사가 중수했다. 조선 숙종 4년(1678) 호암선사, 순조 24년(1824)에 다시 중수를 거쳤고 1924년 성봉선사가 마지막으로 손을 봤다. 절 안에는 건융 24년(1759)에 조성된 것으로 기록된 동종도 남아 있다. 마을 회관과 영랑사 앞에는 수령을 가늠하기 어려운 보호수 두 그루도 서 있다. 최 이장은 “정확한 수령은 알 수 없지만 어른들 사이에서는 500년 가까이 됐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고 말했다.

마을 주민들에게 영랑사는 종교를 떠나 어린 시절 추억의 장소다.

최 이장은 “초등학교 봄가을 소풍 12번 중 7~8번은 영랑사로 갔다”며 “초파일이면 마을 주민들이 함께 모여 잔치를 벌이고 음식을 함께 나눴다”고 말했다. 초파일은 못자리를 시작하는 계기이기도 해서 종교와 상관없이 마을 전체가 함께 즐기는 잔칫날이었다.

고령화와 빈집, 150명 남짓 남은 마을

진관1리는 현재 7개 반에 120~130가구, 인구 150명 안팎이 살고 있다. 반마다 빈집이 한 곳 이상 있을 정도로 공가가 늘었다. 최 이장은 “혼자 살던 어르신이 요양원에 들어가면 자녀가 모시러 오거나 귀농해 들어오는 경우는 절반이 안 되고 나머지는 대부분 빈집으로 남는다”고 전했다.

전형적인 농촌인 진관1리는 논농사 비중이 크다. 인근 주변 저지대는 대부분 논으로 개간됐고, 지대가 높은 곳에서는 자급용 밭농사를 짓는 집도 있다. 한때는 담배 농사도 많이 지어 잎을 엮고 말리는 일에 마을 아이들까지 손을 보탰다. 최근에는 마을 뒷산 일대에서 멧돼지 피해도 늘었다. 최 이장은 “겨울철 눈이 많이 온 뒤 포수들이 300㎏에 이르는 멧돼지를 잡은 적도 있다”며 농작물 피해를 호소했다.

혼자 사는 어르신이 늘면서 경로당 점심 제공은 마을에서 반응이 좋은 제도로 꼽힌다. 최 이장은 “혼자 계시면 찬밥을 먹기 싫어 끼니를 거르기 쉬운데 경로당에 모여 따뜻한 밥을 함께 먹을 수 있어 좋은 제도”라고 말했다. 다만 거동이 불편해 경로당까지 걷지 못하는 어르신은 요양보호사가 챙겨 주는 식사로 끼니를 해결하고 있다.

마을을 반으로 가른 도로진관1리 주민들이 가장 아쉬워하는 대목은 마을을 관통하는 도로다.

채운뜰에서 이어지는 615호선 도로가 마을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면서 진관1리는 사실상 반으로 나뉘었다. 도로 안쪽에 남은 12가구 주민은 경로당에 가려면 도로를 크게 돌아가야 한다. 마을주민들은 “도로가 생겨교통은 좋아졌지만 실제로는 좋아진 것보다 마을이 입은 피해가 더 크다”고 말했다.

도로 개설 과정에서 마을에 돌아온 보상은 사실상 없었다는 게 주민들의 설명이다. 마을주민들은 “동네가 반으로 갈리고 도로와 가까운 집은 소음 피해까지 있었는데 정작 마을이 얻은 혜택은 하나도 없었다”고 지적했다.

경로당 위치도 오래된 숙제다. 지금의 경로당은 20년여년 전, 전 노인회장이 자신의 논을 내놓아 지어졌지만 낮은 지대에 있어 지난해 폭우때 두 차례나 물에 잠겼다. 재해 대피처 역할을 해야 할 경로당이 오히려 위험 지역이 된 셈이다. 최동철 이장은 “노인 접근성을 높이고 침수 위험도 없는 곳으로 경로당을 옮겼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며 “다만 건물 내구성 문제로 선뜻 건의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영랑사~삼선산 잇는 둘레길로 그리는 미래

진관1리에는 반가운 소식도 있다. 영랑사와 삼선산을 잇는 지방정원조성 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완공되면 당진시내에서 걸어서든 차로든 영랑사에서 삼선산까지 한 시간 남짓 산책할 수 있는 코스가 생긴다.

최 이장은 “당진 시내에서도 가까운데다 접근성이 좋아 가족 단위로 산책하기 좋은 코스가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영랑사 주지 스님이 예산 확보에 앞장서 관련 예산을 받아냈고 지난해 설계와 주민설명회까지 마쳤다. 마을 젊은 층 사이에서도 개발에 긍정적인 반응이 많다는 게 마을 이장의 설명이다.

최동철 이장은 “그동안 도로가 나면서 마을이 입은 피해에 비해 얻은게 거의 없었다”며 “삼선산 둘레길 조성을 계기로 마을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사업이 이어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어 “무엇보다 도로로 갈라진 마을이 다시 이어질 수 있게 경로당 접근성을 개선하는 일이 가장 시급하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