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자 주 - 시민의창은 분야별 역량을 갖춘 당진지역 전문가들이 참여해 각 분야의 영역을 심층 취재, 보도하는 코너입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제작 보도합니다.

달력은 아직 5월을 가리키고 있지만, 당진의 산업 현장과 농경지는 이미 여름철 기후 변화에 따른 대비에 들어갔다. 최근 지역 공구상가 매대에는 야외 근로자들의 탈수를 막기 위한 ‘식용 포도당’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고, 영세 제조업체들 사이에서는 찜통더위를 버텨내기 위한 이동식 에어컨 임대 방법을 알아보는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봄의 흔적을 지워버린 지금, 당진의 일터는 예년보다 한발 빠르게 달아오르는 중이다.
문제는 이른 불볕더위가 취약한 일터를 위협하는 ‘반복되는 재난’이라는 점이다. 최근 5년간 당진의 온열질환자 수는 인구 규모가 훨씬 큰 타 도시들을 제치고 충남도 내 최상위권을 기록했다. 이들의 상당수는 냉방 장치가 열악한 현장 근로자들과 고령 농민들이다. 올해 역시 고온의 날씨가 예고된 지금, 당진시의 안전망을 세심히 점검해야 할 시점이다.
이틀간 온열질환자 50명 발생
여름이 길어지고 빨라지고 있다. 기상청에 따르면 최근 10년(2015~2024년) 기준 여름 130일로, 과거 30년(1912~1940년)보다 한 달 이상 늘어났다. 계절 시작 시점 역시 눈에 띄게 앞당겨졌다. 과거와 비교해 여름이 6월 11일에서 5월 25일로 무려 17일이나 빨라졌다. 이제 5월은 달력상으로 봄일 뿐, 기후학적으로는 완연한 여름의 시작인 셈이다. 이처럼 길어지고 빨라진 여름은 우리 지역이 폭염이라는 재난에 노출되는 기간이 그만큼 길어졌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우려는 이미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5월 중순임에도 불구하고 이른 불볕더위가 기승을 부리면서 단 이틀 사이에만 50명의 온열질환자가 한꺼번에 쏟아졌다.
질병관리청 ‘온열질환 응급실 감시체계’ 통계에 따르면, 올해 감시를 시작한 5월 15일부터 19일까지 불과 닷새 동안 전국에서 발생한 누적 온열질환자는 총 71명에 달한다. 지난해 같은 기간 발생 수치(15명)와 비교하면 무려 4.7배나 급증한 규모다. 특히 감시 첫날인 15일 10명을 시작해, 주말이었던 16일과 17일 이틀간 50명이 집중 발생했다.
인명 피해의 시계도 빨라졌다. 감시 첫날 서울 동대문구에서 80대 남성이 온열질환으로 사망하는 안타까운 사례가 신고됐다. 이는 온열질환 감시가 시작된 이래 역대 가장 빠른 사망 사례로, 지난해 첫 사망자 발생 시점보다 한 달 이상 빨랐다.

당진시, 도내 온열질환자 수 최상위권
다행히 현재까지 당진시에서는 공식적인 온열질환자가 발생하지 않았다. 인근 시·군을 중심으로 벌써 3명의 환자가 보고된 것과 비교하면 다행스러운 상황이다. 하지만 이 ‘0명’에 방심해서는 안 된다.
최근 5년간(2021년~2025년) 질병관리청의 충청남도 온열질환 감시체계 운영결과를 분석한 결과, 당진시는 인구 규모가 배 이상 큰 타 시·군들을 제치고 매년 도내 온열질환 발생 수의 최상위(1~3위)권을 단 한 번도 놓치지 않았다.
연도별로 살펴보면 도내 전체 온열질환자가 83명에 불과했던 지난 2021년, 당진은 무려 13명의 환자가 발생하며 ‘충남 도내 1위’를 차지했다. 이어 2022년 15명(도내 3위), 2023년 20명(도내 3위)으로 매년 가파른 상승세를 보였다. 게다가 2024년에는 도내 전체 온열질환자 244명 중 49명이 당진에서 나와 또다시 ‘도내 1위’를 기록했다. 지난해인 2025년 역시 전체 227명 중 41명의 환자가 발생했다. 이중 2명은 끝내 목숨을 잃는 안타까운 사망 사고로 이어졌다. 지난해 충남도 전체 사망자(5명) 중 무려 2명이 당진에서 발생했다. 인구 60만이 넘는 천안에 이어 도내 2위에 올랐는데, 인구 비례로 환산하면 사실상 당진이 충남에서 가장 온열질환에 취약한 위험지대인 것이다.
환자 44% ‘작업장’서 쓰러져
실제로 지난해 7월 당진에서 야외 청소작업을 하던 50대 남자가 의식을 잃고 쓰러져 끝내 사망하는 안타까운 일이 있었다. 사인은 치사율이 높은 열사병으로 인한 다발성 장기부전이었다. 이 비극은 지난해 충남도 전체 온열질환 지표와 정확히 일치한다.
지난해 충남도 내 온열질환자 227명 중 직업별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 것은 ‘단순 노무 종사자’(70명)였다. 이는 건설 현장 보조원이나 공장 포장·운반원, 야외 및 실내 청소 근로자 등 별도의 숙련 기술 없이 육체노동을 주로 담당하는 현장 노동자들을 의미한다. 이어 ‘농림어업 숙련 종사자’(27명)가 뒤를 이었다. 냉방 장치 없는 작업장에서 근무하던 근로자와 논밭에서 일하다 쓰러진 농업인 등 고온 속 장시간 노동에 노출된 이들이 다수를 차지한 것이다.
이들의 취약성은 발생 장소별 자료에서 더욱 극명히 드러난다. 전체 환자 중 실외 발생은 183명, 실내는 44명이었는데, 가장 많은 환자가 쏟아진 곳은 단연 실외 작업장(80명)이었고, 실내 작업장(21명)에서도 적지 않은 환자가 나왔다. 실내외를 막론하고 ‘작업장’이라는 일터에서만 충남 전체 환자의 44%가 넘는 101명이 쓰러진 셈이다.
또 다른 폭염의 덫은 농경지였다. 실외 논·밭(34명)과 실내 비닐하우스(8명)를 합쳐 총 42명의 환자가 농업 현장에서 보고됐다. 모내기와 파종이 한창인 5월부터 7월 사이, 뙤약볕 아래로 나선 고령 농민들과 비닐하우스 안에서 묵묵히 땀 흘리던 이들이 통계의 또 다른 축을 형성했다. 결국 단순 노무자와 농민이라는, 당진을 지탱하는 두 직업군이 폭염 앞에서는 가장 무방비로 쓰러지는 구조가 매년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물·그늘·휴식’ 겉도는 폭염 수칙
폭염을 이겨내기 위한 대책은 의외로 간단하다. 질병관리청과 정부가 매년 강조하는 ‘물, 그늘, 휴식’이라는 3대 기본 수칙만 철저히 지켜도 온열질환의 상당수를 예방할 수 있다. 실제로 대형 공사 현장 등 일부 야외 작업장에는 식수와 임시 그늘 쉼터 등이 설치돼 가동되기도 한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매뉴얼이 영세 공장, 제조업, 물류창고, 농촌 등 당진의 진짜 폭염 취약 사업장 현장에서는 제대로 작동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제조업이나 물류창고 등의 현장은 가뜩이나 환기가 안 되는 상황에서 복잡한 기계 열기까지 더해진다. 게다가 안전사고 예방을 위해 무겁고 두꺼운 작업복과 안전모, 안전화까지 필수로 착용해야 하므로 복장을 가볍게 해 체온을 낮추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광활하고 복잡한 건설 현장에는 행정의 관리 감독이 닿지 않는 ‘그늘 없는 사각지대’가 존재하며, 하청·영세업체 근로자들은 납기일을 맞추기 위해 폭염 경보 속에서도 쉬이 휴식 버튼을 누르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농촌의 논·밭 역시 예방 수칙의 안전지대가 아니다. 고령의 농민들은 사방에 뙤약볕을 가려줄 그늘 한 점 없는 넓은 평야에서 작업을 이어간다. 결국, 현장의 특수성과 노동 환경을 고려하지 않은 채 “물 마시고 그늘에서 쉬라”는 식의 단순한 홍보성 대책은 당진의 공장과 논밭에서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왜 못 지키나” 환경을 고민할 때
지금 필요한 것은 탁상 위 매뉴얼의 양적 확대가 아니라 현장의 사각지대를 파고드는 ‘표적(Target) 행정’이다. 당진시는 지난 15일부터 10월 15일까지 5개월간 여름철 재난안전대책본부를 운영해 상황별 비상 근무체계를 가동한다. 폭염 대응을 위해 재난도우미 1191명을 활용해 취약계층 안부를 확인하고, 무더위쉼터 365개소와 그늘막 220개소를 운영할 예정이다.
그러나 예년처럼 무더위 쉼터 지정 현황을 점검하고 ‘물과 휴식을 챙기라’는 수준의 관성적인 행정만으로는 올해 예고된 역대급 폭염과 공장·논밭의 현장을 감당하기 어렵다. 정부나 지자체에서 수많은 가이드라인을 쏟아내도 현장에서 겉도는 이유는 명확하다. 그것이 강제력 없는 ‘권고’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민간 사업장 입장에서 폭염으로 인한 작업 중단은 곧 ‘인건비 상승’과 ‘납기일 지연’이라는 직접적인 비용 부담으로 이어진다. 농민들 역시 한 해 농사의 생계가 걸린 상황에서 볕이 뜨겁다고 마냥 손을 놓을 수 없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따라서 “쉬라”는 권고가 공허한 메아리가 되지 않으려면, 폭염 취약 사업장이 겪는 부담을 완화해 줄 수 있는 제도적 유인책이나 정부 차원의 근본적인 보전 대책이 논의돼야 한다. 당진시 대책본부 역시 단순한 홍보물 배포를 넘어, 영세 사업장과 농가들이 처한 현실적 한계를 경청하고 지자체 수준에서 지원할 수 있는 실질적 틈새를 찾아내는 데 역량을 집중해야 할 시점이다.
폭염은 이제 단순한 자연재해를 넘어 노동 환경과 경제적 여건에 따라 피해가 집중되는 ‘구조적 재난’이다. 우리 사회가 던저야 할 질문은 “왜 수칙을 지키지 않느냐”는 추궁이 아니라, “왜 수칙을 지킬 수 없는 환경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