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자비의 탁본 일부(전면 왼쪽 부분)
효자비의 탁본 일부(전면 왼쪽 부분)

<편집자주>

시민의창은 분야별 역량을 갖춘 당진지역 전문가들이 참여해 각 분야의 영역을 심층 취재, 보도하는 코너입니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제작 보도합니다.

"낳실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를 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며, 손-발이 다-닳도록 고--생하시-네, 하늘 아래 그 무엇이 넓다 하리오, 어머님의 희생은 가이없어라."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기억할 「어머니 마음」의 노랫말이다. 원래 양주동(梁柱東, 1903~1977)이 쓴 시에 이흥렬(李興烈, 1909~1980)이 곡을 붙였다. 일제강점기인 1938년, 작곡자는 자신의 음악 공부를 위해 온갖 노동을 마다하지 않은 어머니의 ‘넓고’, ‘높고’, ‘거룩’한 헌신을 그렸다고 한다. 이 노래는 지금 모든 이의 마음을 울리는 국민 가곡이 되었다.

옛날 중국인들은 부모에 대한 자식의 도리를 ‘효(孝)’라는 글자에 담았다. 글자는 노인(老)을 등에 업은 자식(子)을 표현한 것이다. 부모를 정성으로 모시고 노인을 지극히 봉양하라는 의미다. 아울러 중국인들은 그들의 바이블로 내세우는 ‘13경(주역, 논어, 맹자…)’가운데 가장 먼저 ‘효(孝)’에 ‘경(經)’이라는 존칭을 붙였고, 이를 ‘효경(孝經)’이라 하였다. ‘경’은 ‘원칙’이나 ‘도리’를 뜻하는데, 결국 ‘인간의 근본적인 도리’를 지칭했다. 한자의 전래와 함께 ‘효경’은 우리나라에도 전래되었고, 유교 사회가 형성되면서 국가와 사회의 가장 중요한 이념이 되었다.

우리의 옛 어른들도 ‘효’에 관련된 각종 서적을 발간하고, 곳곳에 ‘효자비’를 세워 효자의 선행을 표창하였다. 당진지역에도 많은 효자비가 세워져 있는데, 본고에서 서술하고자 하는 효자비는 면천면 성상리 동문 밖에 있는 ‘박희란·박희전 효자비’이다. 이 효자비는 두 가지 점에서 매우 뜻깊다. 하나는 효자비의 모습이 매우 아름답고, 견고한 돌로 만들었다는 점이며, 또 하나는 박희란 형제의 효행 사실과 효자비 건립과정이 매우 상세히 기록되었다는 점이다. 특히 임금의 어명으로 세워졌다는 기록문은 극히 드문 사례에 해당한다.

골정지에서 바라 본 효자비
골정지에서 바라 본 효자비

통돌 팔각기둥에 담은 ‘천원지방’

효자비의 위치는 면천면 성상리 432번지다. 도로명 주소로는 면천면 동문2길 5-7 앞이다. 길에서 서너 걸음 서쪽으로 올라가면 약 1m 높이에 평지를 조성하였다. 효자비는 평지 중앙에 있다.

효자비는 두 개의 기둥으로 세워져 있고 기둥 사이의 폭은 180㎝인데, 외곽까지 합하면 260㎝이다. 기둥은 하나의 통돌로 만들었는데, 기단부는 가로 40㎝, 세로 45㎝의 사각형이다. 그리고 밑에서 15㎝ 올라와서 사면을 깎아 팔면으로 만들었는데 기둥의 높이는 185㎝이다. 팔각기둥은 위로 올라갈수록 작아진다. 기둥의 하단부 둘레가 145㎝인데 비하여, 상단의 둘레는 130㎝이기 때문이다. 이는 고려시대 목조 건축의 배흘림기둥과 비슷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편안함과 무게 중심의 안정감을 느끼게 한다. 효자비의 총 높이는 약 250㎝이다.

팔각기둥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나다’라는 ‘천원지방(天圓地方)’사상을 표현하고 있다. 이 사상에 의하면, 팔각형은 원형과 사각형의 중간에 해당하는 도형으로서,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신성한 도형이었다. 이 때문에 동아시아에서의 팔각 기둥은 중국을 제외하고는 흔히 사용할 수 없는 것인데, 면천의 박희란 형제 효자비에 적용하였으니 그 의미가 매우 자주적이며 또한 주체적이다.

기둥은 상단부에 이르러 다시 사각형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목조 건축에 등장하는 ‘도리’와 같은 두툼한 돌을 양쪽에 놓고 그 위에 지붕돌을 올렸다. 지붕돌은 목조 건축의 우진각 형태이다. 우진각 지붕은 일자형 평면으로 건물의 사면에 지붕면이 있는 형태인데, 서울의 숭례문과 같은 지붕을 말한다.

효자비 모습(봄)
효자비 모습(봄)

앞뒤 면석에 새긴 형제의 충효

효자에 대한 설명은 면석(돌판)에 새겼는데, 면석은 가로 197㎝, 세로(높이) 45㎝, 두께는 27㎝이다. 그리고 면석은 지붕돌 바로 아래, 두 개의 기둥 사이에 끼웠다. 전면에는 효자비의 명칭을 새기고 글씨에 붉은 칠을 하였는데, ‘孝子贈通政大夫朴希蘭嘉義大夫朴希筌之閭(효자증통정대부박희란가의대부박희전지려)’이다.

박희란이 효자로 인정되어 통정대부를 사후에 증직받았는데, 통정대부는 조선시대 문관의 정3품 품계다. 가의대부는 같은 문관으로 종2품 품계다. 당시 홍주목사가 정3품이고, 충청도 관찰사가 종2품이니, 매우 높은 품계라 하겠다.

전면의 끝부분에는 ‘崇禎紀元後九十四年辛丑五月日以忠孝節行命旌(숭정기원후구십사년신축오월일이충효절행명정)’이라 썼다. ‘숭정기원후 94년’은 명나라 의종(毅宗)이 즉위한 1628년을 기준으로 한 연도 계산인데, ‘신축년’으로 기록되어 1721년(경종 1)을 뜻한다. 이해에 박희란과 박희전 형제가 ‘충효절행’으로 조정으로부터 ‘정(旌)’을 받았다는 것이다.

면석의 뒷면에는 박희란과 박희전의 행적과 효행 사실을 한문 340여 글자로 기록하였다. 다소 길지만, 전문을 해석하여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신축년(辛丑) 5월 20일 도착(접수). 예조(禮曹)의 관문(關文) 내용은 이러하다. 박진도(朴震度)가 상언(上言)을 올렸고, 이에 근거한 예조의 계목(啓目)이다. 이 상언을 살펴보니, 그의 증조 박희란(朴希蘭)과 동생 희전(希荃)은 충효의 행실과 의리가 타고난 천성(秉彝)에서 우러난 것이었다. 희란은 수영(水營)의 영리(營吏)로 있으면서 윗사람을 섬기고 공무를 받드는 데 반드시 도리에 맞게 하였다. 베를 변통하여 사람을 사서는 날마다 부모의 집으로 보내 그 안부를 살피게 하였다. 어머니의 병이 위독해지자 손가락을 끊어 피를 흘려 넣으니, 다행히 소생하여 천수를 누리고 돌아가셨다. 장례를 치르고 제사를 받드는 데 예법과 슬픔을 다하였다’

‘정축년(丁丑, 1637)의 전란 때에는 수사(水使) 강진흔(姜晋昕)의 군중에 소속되어, 주장(主帥)을 날개로 감싸듯 엄호하면서, 한편으로 화살을 대주고 한편으로 적을 쏘아 살상한 수가 매우 많았다. 그러다 갑자기 날아온 화살(流矢)에 맞아 끝내 일어나지 못하였으니, 이는 "나랏일에 죽은 자(死於國事)"라 할 만하다.’

효자비의 모습(겨울)
효자비의 모습(겨울)

‘희전은 어머니가 병들자 손가락을 끊었고, 아버지가 병들자 또 손가락을 끊어 능히 꺼져가는 숨(纊息)을 이을 수 있게 하였다. 또 군수 구인기(具仁基) 때에 사나운 호랑이가 횡포를 부려 물려 죽은 사람이 많자, 군수가 포위망을 치고 잡기를 독려하였다. 호랑이가 군수 앞으로 달려들자, 희전이 창(戟)을 들고 뛰쳐나가 크게 소리치며 호랑이를 찔러 군수가 무사할 수 있었다’

‘병자년(丙子, 1636) 겨울, 신임 수령을 배행(陪行)할 아전으로서 상경할 때, 군수 김광수(金光燧)가 임금께 하직하고 행궁(行宮) 길을 가다가 적을 만나, 적이 그 말과 짐을 모두 빼앗아 갔다. 희전이 곧 오랑캐 추장(胡酋) 앞에 나아가 청하여 말 한 필을 얻어, 수령을 부축·호위하여 임지에 이르게 하였다. 그 충효의 실제 행적은 이미 도신(道臣, 관찰사)의 장계(狀聞) 가운데 진술되어 있다. 해당 조(예조)로 하여금 즉시 복계(覆啓)하게 하고, 정표(旌表)하는 일도 함께 아뢴 바이다.’

‘희란 형제의 절행(節行)이 이미 이처럼 탁이(卓異)하고, 더구나 하급 아전(下吏)의 신분으로도 오히려 충효의 도리를 능히 다하였으며, 난리에 임하여 더욱 힘썼으니, 아랫사람으로서의 절개로는 더욱 가상하다. 마땅히 정표의 은전이 있어야 할 듯하나, 일이 은전(恩典)에 관계되므로 감히 함부로 처리하지 못하였다.’

‘임금의 재가(上裁)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상 아룁니다”하니 (임금께서) “회계(回啓)한 대로 시행하라”라고 판하(判下)하셨으니, 박희란·박희전 두 사람의 정문(旌門)을 정밀히 만들어 세우는 일을 분부하여 시행하라 하였다. 임인년(壬寅, 1722) 10월 모일에 세움’

효자비의 전면
효자비의 전면

상언에서 입석까지 이어진 정려 건립

이 글은 정려(旌閭) 조성의 전 과정을 압축해 보여 주고 있다. 박진도의 상언(上言)에 이어, 도신(관찰사)의 장계(狀聞), 그리고 예조의 복계(覆啓)와 계청, 뒤이어 임금이 “의회계시행(依回啓施行-회계한 대로 시행하라)”이라고 내린 재가, 곧 명정(命旌)에 이어 신축년(1721) 정문 건립 지시, 임인년(1722) 입석(立石)으로 이어지는 행정 절차 전체가 고스란히 기록되었다. 마지막으로 예조 관문(關文)의 전문을 새기고 맨 끝에 입석 연월을 새겼다.

『여지도서』에 보면, 정려는 ‘肅宗朝命旌(숙종조에 명하였다)’라고 기록하였다. 이를 볼 때, 명정의 결정은 숙종 말년(1720)에 내려지고 그에 따른 효자비 건립 지시가 이듬해 신축년(1721) 관문으로 시행된 것으로 판단된다.

『밀양박씨규정공파대동보』에 보면, 박희란의 자는 형백(馨伯)이다. 아버지는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증직된 박우림(朴遇霖)이고, 어머니는 정부인(貞夫人) 청주 한씨(淸州韓氏), 부인은 숙부인(淑夫人) 청주 한씨라고 기록되었다. 박희전의 자는 형련(馨蓮)이고 부인은 정부인(貞夫人) 제주 고씨이다. 아울러 효자비는 1721년 6월 24일 목문(木門)으로 세웠다가, 1722년 10월 21일 석문(石門)으로 개립(改立)하였다고 썼다.

효자비의 뒷면
효자비의 뒷면

단지·상분·할고로 이어진 효의 실천

박희란·박희전 형제의 효행은 ‘단지(斷指)’로 정리된다. 한편, 1933년에 간행된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 당진군 효자 편에는 모두 64명의 효자를 기록하고 있는데 효자의 대부분은 부모가 위독해지면 박희란 형제와 같이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먹여 드렸다. 그러면, 병자는 다시 소생하곤 하였다. 피가 의학적으로 가치가 있겠는가만은, 자식의 지극한 정성이 하늘을 감동시킨 결과가 아닐까 싶다.

극히 일부이지만, 부모님의 변을 맛보아 병세를 살피는 ‘상분(嘗糞)’을 한 사례도 있다. 정미면 수당리에 묘소가 있는 김철명(金哲命)이 상분 효자다. 가장 어려운 효행으로는 ‘할고(割股)’가 있다. 이것은 허벅지 살을 베어내어 끓여드리는 것이다. 『백범일지』(돌베개, 181쪽)에 보면, 김구도 부친상을 당하기 직전에 허벅지 살을 도려내 달여드렸다는 기록을 남겼다. 그러나 양이 부족하여 두 번째 시도하였으나 고통이 극심해 베어내지 못했다고 자책하였다.

현대인의 시각으로 볼 때, 효행의 길은 눈물겹고도 고통스러운 길이었다. 하지만, 박희란 박희전 형제는 나라에 대한 충성과 더불어 부모에 대한 효행을 극진히 실천하였다. 그리고 후손과 주민은 이들의 효행을 교훈으로 삼기 위해 돌에 새기고 팔각기둥에 올려 영원히 기리고자 하였다. 상당히 희소한 돌 효자비를 통해 살펴본 면천 사람들의 정신, 정체성(正體性)은 바로‘효(孝)’다.

(효자비의 비문은 탁본 작업을 거쳐 인공지능(AI), 3.10기념사업회 유재석 회장님, 전주대학교 한문교육과 이남종 전(前)교수님의 도움으로 번역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