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잘한다’는 주관적 명제의 기준은 어디에 명줄을 대고 있는가. 타인의 값싼 칭찬을 수집하는 것, 혹은 액정 너머로 가볍게 휘발되는 무수한 ‘좋아요’의 개수가 과연 한 인간이 쏟아낸 노력의 정답이 될 수 있을까.
작년 초, 나는 어떤 기타 악보 하나에 완전히 매료되어 있었다. 내 일상의 모든 감각이 온전히 여섯 개의 줄 위로 수렴되던 시기였다. 눈뜨자마자 한 번, 밥을 먹다 말고 한 번, 밤이 깊어 눈이 침침해질 때까지 넥을 잡았다. 손끝이 찢어지고 딱딱한 굳은살이 껍질처럼 쌓이는지도 모른 채 종일 줄을 튕기던 그 시절, 솔직히 나는 내가 대단한 연주자인 줄 알았다. 어릴 때부터 주변에서 무책임하게 던져준 찬사들이 내 자만심을 지나치게 부풀려놓았기 때문이다.
그 오만한 기세를 몰아 SNS라는 가상의 무대에 올랐다. 처음엔 때 묻지 않은 순수한 희열이었다. 나와 같은 코드를 사랑하는 익명의 존재들이 도처에 있다는 사실이 경이로웠고, 매일 올리는 서툰 영상에 찍히는 고작 한두 개의 기호적 반응에도 심장이 요동쳤다.
그러나 그 가상 세계의 수면은 너무도 깊고 잔인했다. 화면을 쓸어 올릴수록 그곳은 천재들의 박람회장이었다. 헐렁한 후드티 아래로 무심하게 손가락을 굴리는 것만으로도 수만 개의 하트를 독식하는 사람들. 그 압도적인 격차 앞에서 내 자존감은 여지없이 무너져 내렸다. 본래도 타인이라는 척도에 나를 비추어보길 즐기던 병리적인 비교 버릇이 도진 것이다. 온 밤을 갈아 넣어 얻어낸 나의 초라한 숫자가 그들의 방대한 데이터와 충돌할 때마다, 나는 내 방구석의 누추한 실루엣을 혐오하기 시작했다.
타인의 찬사는 어느덧 조롱이나 기만으로 치환되어 내 귓가에 도착했다. 현을 짚을 때마다 마음속에서 시커먼 가시가 돋아났다. ‘이 어설픈 손가락으로 대체 무엇을 증명하겠다는 건가.’ 진지하게 악기를 내다 버릴까 고민했다. 그러나 미련하게도, 손끝을 타고 흐르는 현의 울림 자체는 거부할 수 없는 순수한 쾌락이었다. 스스로를 부정하면서도 본능적으로 다시 줄을 튕기는 모순의 연속이었다.
반응에 대한 집착을 비워내고 그저 묵묵히 기록을 지속했다. 가끔 하트 백 개라는 소박한 보상이 주어지는 날도 있었으나, 그렇다고 내 삶의 궤적이 극적으로 변하진 않았다. 여전히 수많은 시선으로부터 소외당하는 영상이 수두룩했다. 그렇게 외부의 인정이라는 과잉된 필터를 거두어내고, 오직 내 마음의 허기를 메우기 위한 주체적 연주를 지속했을 때, 기어이 ‘1,700’이라는 숫자가 화면에 점멸했다.
찰나의 숫자를 응시하며 비로소 뼛속 깊은 깨달음이 찾아왔다. 대중은 결코 완전무결한 연주에만 마음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잘한다는 것의 진짜 기준은 타인의 검지 손가락이 아닌, 오직 철저한 자기 충족적 만족에 수렴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국어사전을 펼쳐보니 자기만족이란 ‘자신의 노력과 결과에 대해 스스로 만족하는 상태’라고 적혀 있다. 그래, 내가 내 밀실에서 나의 선율에 도취하겠다는데, 대체 어떤 외부의 권위가 나의 유희에 불합격의 판정을 내릴 수 있겠는가.
그 작은 인식의 균열 이후, 나의 세계는 완전히 재편되었다. 예전엔 잘함의 기준이 무조건 상대적인 평가와 남들의 인정인 줄 알았는데, 이제는 ‘내 귀에 아름다우면 그만’이라는 단독성을 신뢰한다. 마음에 숨구멍이 생기니 나를 옥죄던 빳빳한 강박이 스르륵 풀렸다. 메말랐던 내 손가락은 다시 존재론적인 아름다움을 회복했고, 타인의 칭찬도 그제야 날것의 진심으로 들려와 웃음이 났다. 조금 더 일찍 이 마음의 중심을 잡았더라면 그 아까운 새벽들을 괴로움으로 낭비하지 않았을 텐데, 우스운 억울함마저 든다.
우리는 타인의 시선이라는 거대한 감옥에 살고 있다. 손가락 하나로 남의 화려한 일상을 관음하고, 내 이면의 결핍을 확인하는 자기파괴적 루틴이 너무나 쉬워진 시절이니까. 더 많은 인정을 받으려고 스스로를 꾸며내고 가공할수록, 원본의 자아는 소멸해 간다. 내 가치를 타자의 평가라는 불안정한 자본에 의탁하는 순간, 주체는 필연적으로 불안의 심해로 난파될 뿐이다.
만약 지금 이 순간에도 작은 액정 화면을 바라보며 밤마다 자존감을 갉아먹는 누군가가 있다면, 굳은살로 단단해진 내 손바닥을 보여주며 나직하게 말해주고 싶다. 외부의 갈채라는 신기루는 결코 너의 실존을 책임져주지 않는다고.
기준선을 남이 아닌 네 눈높이에 맞출 때, 우리는 비로소 외부의 승인 없이도 스스로를 온전한 목적 자체로 대면할 수 있다. 그것이 외부 세계의 거친 바람에 마모되지 않는 단단한 자아를 구축하는, 진짜 성장의 시작이다.
오늘 밤에도 나는 방 안의 불을 모두 끈 채, 내 영혼의 규격에 완벽히 부합하는 6번 줄을 튕긴다. 화면 너머의 유령 같은 수천 명의 시선보다, 지금 이 울림을 가장 먼저 듣고 있는 내 내부의 감각이 충만하다면, 그것으로 나의 우주는 완벽히 완결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