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자주> 시민의창은 분야별 역량을 갖춘 당진 지역 전문가들이 참여해 각 분야의 영역을 심층 취재, 보도하는 코너입니다. 이번 코너는 김남석의 면천역사산책 여섯 번째 ‘조선시대 면천군(沔川郡)의 위엄을 되살리다’입니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제작 보도합니다.
한문 ‘악(樂)’자는 대표적인 다음자(多音字)다. 다음자란 하나의 한자가 둘 이상의 음과 뜻을 갖는 경우를 말하는데, 일반적으로 ‘음악 악’, ‘즐거울 락’, ‘좋아할 요’의 세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한자어원사전』에 보면, 원래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가운데에는 현(絃)을 맨 악기가 있고, 양옆에는 악기의 장식이나 받침을 나타내고 있다. ‘악기’ 또는 ‘음악’에서 출발해 ‘즐거움’, ‘좋아함’으로 의미가 파생된 듯하다.
당진시 대호지면 도이리에 가면 남유장군과 남이흥장군을 배향하는 충장사가 있고, 그 입구에 큰 비석 세 기가 서 있다. 왼쪽부터 남이흥장군 신도비, 그 부친인 남유장군 노량유허비, 남이흥장군의 조부인 남응룡 신도비이다. 그런데 남응룡 신도비의 앞면을 보면 ‘二樂堂南應龍公神道碑’라고 새겨 있다. 비문을 읽던 어떤 분이 ‘이락당!’하고 읽었다. 그런데 여기에서의 ‘락’은 ‘요’로 읽어야 한다. ‘이요당’이 맞기 때문이다.
『논어』 「옹야(雍也)」편에 보면, ‘지자요수(知者樂水), 인자요산(仁者樂山)’이라는 구절이 있다.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라는 의미다. 뒤이어 ‘지자동(知者動),인자정(仁者靜), 지자락(知者樂),인자수(仁者壽)’라고 하였다. ‘지혜로운 사람은 움직이고, 어진 사람은 고요하다. 지혜로운 사람은 즐겁게 살고, 어진 사람은 오래 산다’라는 뜻이다. 한 구절 안에서도 ‘악(樂)’은 ‘요’와 ‘락’으로 쓰였다. 남응룡은 ‘요산요수’에서 ‘두 가지를 좋아한다’라는 뜻으로 ‘이요당’이라는 호를 지었을 것이다.
‘풍락’의 의미는 『면천향교지』(하권, 43쪽)의 「풍락루기(豊樂樓記)」에 잘 나타나 있다. 즉, 누각은 1852년 면천군수인 이관영(李寬永)이 지었는데, 그는 ‘군수가 나라를 근심하여 풍년이 들기를 기원’하여 풍락루라 이름지었다고 한다. 아울러, ‘살기에 지극히 풍요로우며 경작에 편안하고, 해마다 풍년을 즐겨하고, 관에서는 백성의 즐거움을 즐겨하고, 백성은 생업의 즐거움을 즐겨하며, 초목과 조수에까지 다 함께 풍성치 아니함이 없으니 이것이 풍락이다’라고 말하였다. 정리하면 ‘풍년의 즐거움’을 의미한 것이다.
백성의 풍년을 기원한 풍락루
‘풍락루’는 면천 관아의 대문으로 2층 누각이다. 이관영이 기록한 바와 같이 그는 신해년인 1851년(철종2) 10월에 면천군수로 부임하였다. 그가 와보니 창고에는 곡식이 부족했고, 관아 건물은 오랫동안 헐어서 도저히 쓸 수 없는 지경이었다. 그리하여 기둥과 기와를 가려서 정리하고, 관아 밖에 삼문(三門)을 다시 세우고, 문 위에 누각을 지어 풍락루라는 현판을 걸었다.
한편, 『당진군사』(1936, 당진문화원 번역, 34쪽)에도 면천군수 심영경(沈英慶)도 경오년인 1870년에 풍락루를 중수하고 현판을 걸었다고 기록하였다. 심영경이 1869년 12월부터 1871년 6월까지 면천군수에 재임한 것을 보면, 이관영이 지은 것을 심영경이 보수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일제강점기가 되면서 면천관아는 면천면사무소가 되었고, 풍락루는 한동안 면사무소의 누문으로 사용되었다. 이후 건물이 노후화되면서 1943년 결국 철거되었다.
특이한 점은 현판(편액)이다. 풍락루 현판은 누가 썼는지 모른다. 그런데 건물이 철거된 후에도, 현판은 없어지지 않았고 면천초등학교에서 이를 보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면천초등학교 100년사』(2008, 70쪽)를 보면, 학교 향토실 내부의 모습이라는 사진이 있다. 이 사진은 1980년에 촬영하였다고 쓰여 있는데, 그 안에 풍락루와 조종관의 현판이 보관되어 있었다. 이 현판의 글씨가 현재 누각에 걸린 현판과 동일하다. 조종관도 마찬가지다.

면천 관아의 손님맞이, 조종관
풍락루 옆에는 면천객사인 조종관이 있다. 객사(客舍)는 말 그대로 면천을 방문한 관리들이 숙박하는 숙소였다. 『당진군사(1936)』에는 태종 때 건설되었다고 기록하였는데, 당진시의 안내문에 의하면, 1433년(세종15)에 처음 설립되었고, 다섯 차례의 중수를 거쳐 1662년(현종3)에 다시 건립되었다고 한다.
특별한 점은 조선시대 후기의 『면천읍지』에 의하면, 면천객사의 규모가 82칸(間)이라고 한 것이다. 여기서 82칸은 방이 82개였다는 의미가 아니라, 객사를 구성하고 있는 정청과 좌우 익헌, 행랑과 문 등 객사에 딸린 여러 건물의 칸수를 합한 것을 의미한 것이다.
전통 건축에서 1칸은 기본적으로 ‘기둥과 기둥 사이에 형성되는 공간’을 말한다. 따라서 건물 하나가 정면 5칸, 측면 3칸이라면 15칸 규모라고 표현된다. 어쨌든 82칸이라는 점에서 당시 면천 객사가 상당한 규모를 갖춘 관아시설이었음을 보여준다. 안내판에는 현재 규모 총 33칸, 면적은 207㎡이라고 기록하였다.
객사의 중심부인 정청(正廳)은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신 곳이다. 전패는 말 그대로 ‘전(殿)’자를 새긴 나무패를 의미한다. 대한제국기에는 황제를 상징하는 ‘궐패(闕牌)’를 봉안하기도 하였는데, 일반적으로 지방 관아의 객사에서는 전패만 모셨다.
면천군수는 매월 초하루와 보름날 정청에서‘망궐례(望闕禮)’라는 의식을 거행하였다. 망궐례는 ‘대궐을 바라보며 올리는 예’라는 뜻으로, 지방관이 객사 정청의 전패를 향해 국왕에게 절을 올리던 의식이다. 정청은 대궐과 동일체였고, 그래서 정청의 기둥은 일반 건물보다 격식을 높여 원형을 썼다. 임금은 하늘이고 하늘은 둥글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 사상의 표현이기도 하다.
면천군수로 새로 부임한 경우에도 망궐례를 했다. 실제로 박시순(朴始淳)이 쓴 『면불일기(沔紱日記, 번역:당진문화원)』 1894년 11월 16일 자를 보면, 군수로 임명되어 면천에 도착한 즉시 객사에 가서 예를 올리고 있다. 아울러 다음 날 이른 아침에는 면천향교에 나가 대성전에 예를 올리고, 재실에 들어가 향교의 대표인 도유사 구춘서(具春書)와 환담을 나누었다. 그리고 26일에도 동짓날이라고 객사에 나가 예를 올렸고, 12월 1일에도 예를 올렸다. 이날은 새벽부터 눈이 내렸는데, 눈을 맞으면서도 의식은 거행되었다. 망궐례는 면천군수가 반드시 수행해야 하는 업무 중의 하나였다.
동익헌과 서익헌, 문무의 공간
한편, 정청의 양쪽에는 온돌방이 설치되었는데, 동쪽에 있는 숙소를 동익헌(東翼軒), 서쪽에 있는 숙소는 서익헌(西翼軒)이라 한다. 모두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나 사신이 머무는 숙소였다. 현재 복원된 면천객사를 보면, 정청은 정면 3칸에 측면 3칸, 동익헌은 정면 5칸에 측면 3칸, 방은 정면 2칸에 측면 1칸이다. 그런데 서익헌은 정면 3칸에 측면 3칸, 방은 정면 1칸에 측면 1칸이다. 동익헌이 서익헌의 2배 규모다.
일반적으로 동(東)은 문(文)을 의미하고, 서(西)는 무(武)을 의미했다. 조선시대의 양반(兩班) 개념도 임금을 중심으로 동쪽에 도열한 집단(東班-문반)과 서쪽에 도열한 집단(西班-무반)에서 출발하였다. 이는 고려시대부터 등장한 숭문경무(崇文輕武)사상의 표현이었다. 이 사상은 조선시대에 문무 양과의 실시로 완화되었다고 하지만, 문반(동반)을 우월시하는 풍조는 여전했다. 이 풍조가 숙소의 크기로 표현된 것이다.
정청 위에 걸린 편액, 즉 조종관이라는 새 현판이 매우 선명하다. 조종관(朝宗館)의 ‘조종(朝宗)’은 중국의 고전 『시경(詩經)』에 나오는 구절이다. 즉, 『시경』 「소아(小雅)」 면수(沔水)에 보면, 면피유수(沔彼流水) 조종우해(朝宗于海), 율피비준(鴥彼飛隼) 재비재지(載飛載止), 차아형제(嗟我兄弟) 방인제우(邦人諸友), 막긍념란(莫肯念亂) 수무부모(誰無父母)가 나온다.
이를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넘실넘실 흐르는 저 물은 바다를 향하여 흘러드는데
빠르게 나는 저 송골매는 날기도 하고 머물기도 하는구나.
아, 우리 형제들이여! 나라 안의 벗들이여!
아무도 이 어지러운 세상을 걱정하려 하지 않으니
그 누군들 부모가 없겠는가
이곳에서 중요한 구절이 첫 번째인 ‘면피유수(沔彼流水) 조종우해(朝宗于海)’이다. 특히 ‘조(朝)’는 제후가 천자를 조회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고, ‘종(宗)’은 귀의하고 근본으로 삼는다는 뜻이 있다. 결국, 물이 바다로 흘러드는 모습을 제후들이 천자를 향해 모이는 것에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 한 가지 덧붙이면, 당진현의 객사 현판은 ‘망신관(望宸館)’이다. 그 뜻은 ‘멀리 임금이 계신 곳을 우러러본다’이다. 임금께 충성하겠다는 다짐을 담고 있다고 하겠다.
조종관에 대하여 추가할 내용은 학교 관계다. 일본 제국주의 침략으로 나라가 위기에 빠지면서, 면천의 지식인들은 근대학교설립을 서두르게 되었다. 이들은 학생을 모아 가르칠 공간으로 면천교회 터와 면천향교의 명륜당을 지목하고 이곳에 1908년 사립 면양학교를 세웠다. 그런데 나라가 결국 강탈된 직후, 조선총독부는 관공서였던 조종관에 공립학교를 세우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1911년 공립보통학교의 설립 인가를 얻자마자 면양학교의 교직원과 학생을 강제 흡수하여 면천공립보통학교를 개교하였다.
조종관의 목조 건물은 해방 이후 1970년대 초까지도 존속하였다. 하지만, 결국 면천초등학교가 커지면서 건물은 헐리고, 콘크리트 교사(校舍)로 바뀌었다. 일반적으로 학교 건물의 배치는 교문과 운동장을 지나 교사로 이어진다. 그러나 면천초등학교는 교문과 교사, 그리고 운동장으로 이어지는데, 애당초 조종관 건물을 교사로 활용하는 관계로 운동장은 뒤로 뺀 것이 아닌가 싶다.

먼 후세에 맡긴 남문 누각, 원기루
마지막으로 원기루(遠寄樓)다. 조선후기 『면천읍지』 「누정(樓亭)」편에 보면 ‘원기루는 성(城) 남문루(南門樓)이다’라고 기록되었다. 이곳에는 반월루(伴月樓), 원기루, 건곤일초정(乾坤一草亭), 군자정(君子亭) 등 4곳이 소개되는데, 그중의 하나다. 면천읍성에는 세 곳에 문이 있었고 모두 현판이 있었을 텐데, 근거를 찾을 수 없다. 오직 남문에 있던 누각만 알려지고 있는 셈이다.
『면천면지』(2013, 1061~1063쪽)에 보면 「원기루기(遠寄樓記)」, 「원경루기(遠景樓記)」, 「원기루중수소기(遠寄樓重修小記)」의 번역문이 있다. 이 기록을 바탕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18세기의 면천읍성은 이미 허물어져 있었다. 성이 무너지면서 문과 누각도 폐허가 되었고, 남쪽 누각만 절반 정도 남아 있었다. 1764년(영조40)에 면천군수로 부임한 김종수(金鍾秀, 호:夢梧)는 이듬해인 1765년 남문 문루를 중건하고 원기루(遠寄樓)라는 이름을 붙였다. ‘원(遠)’은 먼 훗날을, ‘기(寄)’는 맡긴다는 뜻이다. 읍성을 복원하지 못한 현실 속에서 남문 문루만 중건함을 기록하고, 옛 읍성을 회복할 사람을 기다린다는 뜻을 담았다.
원기루를 중건한 지 7년째인 1771년(영조47), 면천군수로 부임한 이운영(李運永, 자:健之)은 문루에 올랐다. 문루에서 보이는 풍광은 뛰어난 경승(景勝)이 아니었다. 대신 넓은 들이 보였고, 그 들에는 누군가 밭을 갈고 있었다. 또 누구는 모여서 들 밥을 먹고 있었다.
문학적 소양이 깊었던 그는 소동파(蘇東坡, 蘇軾)의 「미주원경루기(眉州遠景樓記)」를 떠올렸다. 북송의 시인인 소동파가 자신의 고향인 미주의 원경루를 두고 쓴 글이었다. 이운영은 면천의 모습이 원경루만큼 빼어난 풍광은 아니라고 하였다. 하지만, 눈 앞에 펼쳐진 들에서 평화롭게 살아가는 백성의 모습이야말로 기암괴석보다 아름다운 풍광이라 여겼다. 그래서 이운영은 원경루(遠景樓)라는 새 이름을 남겼다.
그 뒤로 또 30여 년이 흘렀다. 1802년(순조2) 유한재(兪漢宰)가 면천군수로 부임하였다. 그는 1803년 군자지를 정비하고 인공섬을 쌓았으며 군자정을 세운 인물이다. 그가 와서 보니, 남문 누각의 단청은 벗겨지고 마루와 난간이 허물어져 있었다. 그는 40년 전 면천군수로 부임했던 김종수가 아버지의 친구였던 관계를 떠올리며 김종수의 업적을 계승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갑자년인 1804년, 원래 이름인 원기루(遠寄樓)로 현판을 올리고, 누각을 보수하였다. 후일 성곽을 정비할 사람을 기다린다는 김종수의 말을 자신이 일부나마 완성하였음을 기록한 것이다. 결국 김종수는 미래를 기약하였고, 이운영은 현재의 풍광을 발견하였으며, 유한재는 과거의 바람을 완성하였다.

다시 살아난 면천군의 위엄
현재 풍락루와 조종관, 원기루는 모두 복원되었다. 풍락루는 2007년에 전면 3칸 측면 2칸, 2층 누각, 팔작지붕 건물로 복원하였다. 복원의 기초자료는 면천초등학교 앨범에 수록된 사진이었다. 이 사진은 1940년에 촬영한 것으로, 『면천초등학교 100년사』(346쪽)에 ‘풍락루 앞에서 청소하는 학생들’이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었다.
면천객사 조종관은 2020년 발굴조사를 거쳐 2022년 6월에 복원공사를 완료하였으며, 원기루는 면천읍성 정비 과정인 2012~2014년에 복원공사를 수행하였다. 2001년 서벽과 서치성에서 시작한 면천읍성 정비사업은 2022년 동남벽을 복원하였고, 지금도 지속적으로 진행 중이다.
이로써 조선시대 내포의 거점고을이었던 면천군(沔川郡)의 명성은 크게 회복되었고, 옛날의 위엄도 되찾게 되었다. 아울러 면천의 미래를 기다림이 아니라 적극적인 준비로 맞이하게 되었다.
김남석-면천 3.10학생독립만세운동기념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