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천은 조선시대 329개 지방 행정 기구 중 100위권안에 드는 유력군으로 관아 시설이나 예산 등도 튼실 했다. 그러나 면천향교지에 전하는 역대 군수 명단은 매우 불완전한 것으로 조선실록에 등장하는 10여명의 면천군수를 합해도 턱 없이 부실(?)하다. 다행스럽게 승정원일기에 대량의 역대 면천군수가 기록되어 큰 기쁨을 준다.
승정원일기는 검색이 가능하나 국역이 되어 있지 않은 탓에 한문에 능통하지 않으면 읽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승정원일기에 면천 군수가 최초로 등장하는 1626년 인조4년 ‘강선여’ 다. 그로부터 1797년 6월 26일 박지원까지 대략 70명에 이른다.
이들 중 훗날 정승에 오른 ‘김이복’, ‘김종수’, ‘유언제’ 등 유명인도 보인다.
박지원은 1797년 6월26일 희정당에서 정조의 특명을 받고 하직 인사를 한다. 박지원은 한양 계동집에서 여장을 준비하여 과천 평택을 거쳐 면천에 도착한다. 도착한 첫날 박지원은 나팔을 불고 북을 치며 성문을 닫는 의식이 영남고을보다 장중하고 절도가 있다 기록한다. 부임한 즉시 박지원에게 부여된 임무는 충청수군의 합동 훈련이다.
박지원은 면천군수이자 수군 장수로 두척의 면천 전투선에 백여명의 수군을 태우고 안흥 앞바다를 거쳐 오천 수영으로 전개하는 훈련을 한다.
훈련이 끝난 후 박지원은 ‘이방익의 일’이란 보고서를 작성하여 정조에게 올린다. 이방익은 제주도에서 표류하여 중국을 거쳐 수년만에 돌아온 어부로 그의 경험을 자료로 남기는 일이 박지원에게 떨어진 것이다. 박지원의 중요 임무는 당시 충청도를 발호하는 서학을 단속하는 것이었다.
박지원은 1795년 청양 금정역장으로 내려와 있던 정약용의 기지로 체포한 이존창(1752-1801)을 대면한 후 그를 설득한다. 그리고 사형이 내려진 이존창의 사면을 정조에게 청하여 일시 방면을 이끌어 내기도 한다. 박지원은 관찰사 한용화와 갈등으로 사표를 내고 한양으로 무단 상경하기도 한다. 이 보고를 받은 정조는 의금부 관원을 한강으로 보내 박지원의 도강을 막고 돌려 보내기도 했다.
박지원은 양제저수지를 대대적으로 개축하고 향교앞에 버려진 저수지를 수리하여 물을 가두고 가운데에 작은 초가 정자를 짓고 나무다리를 향교쪽으로 내고는 늙은이가 정자를 짓자 반기는 비가 내린다는 중국 고사를 들어 ‘취옹희우우사정’이라 이름을 짓기도 한다. 박지원은 ‘한용화’ 다음으로 내려온 관찰사 '이태영'에게 정자의 현판을 청하여 받기도 한다.
박지원은 면천에서 <칠사고>, <면양잡록> 등 여러권의 책을 쓴다. 당시 평균 1년을 채우기 힘들던 군수직을 37개월이나 할 수 있었던 것은 책을 쓰는 박지원을 옹호한 정조의 후원이었다. 박지원은 면천 군수를 하며 지역의 숙원 사업 하나를 해결한다. 그것은 면천에 계속 부과돼온 전함건조의 혁파였다.
당시 면천은 내포의 유력군으로 손꼽혀 전함과 화포제작의 과업이 계속 되어 인조, 숙종, 영조 시대를 내려오며 면천군의 재정에 고충을 주고 있었다.
박지원은 1800년 6월 정조의 죽음과 함께 충청도 관원들을 대표하여 고유문을 짓고 8월 강원도 양양부사로 승진하며 면천을 떠난다. 그의 나이 64세였다. 박지원에게 있어 면천은 제2의 고향이라 할만하다.
박지원은 면천에서 생활하며 많은 책을 썼고 ‘서얼철폐’, ‘노비혁파’ 등을 조정에 건의문으로 내기도 한다. 박지원은 양양에서 수개월만에 체직되어 한양 집으로 돌아와 수년만에 죽음을 맞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