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당쟁

일본으로부터 몇차례나 사신이 와서 우리 통신사를 보내 달라는 요청이 있자 마침내 우리 조정에서도 최후의 결정을 보게 된것은 선조 22년(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년전)의 일이었다 한다.

통신사 황윤길, 부사 김성일 일행이 부산을 떠나 대마도를 거쳐 일본 경도에 도착, 秀吉(수길)의 관저聚樂第(취락제)에서 만나 본 수길의 태도는 극히 거만했으며 그의 얼굴은 검고 키가 작아 남보다 다른점이라고는 안보였는데 다만 눈이 약간 빛나는 것 같았다는 것이 懲毖錄(징비록)의 기록이다.

그들 사신 일행이 돌아와 선조의 어전에서 서로 어긋나는 복명을 했던 일, 초등학교 시절 역사시간을 되돌아 본다.

黃(황)은 일본의 출병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고 金(김)은 그렇치 않다 했으며 황은 수길의 눈이 빛나고 담력이 있어 보이더라 했는데 김은 그 눈이 쥐와 같아 두려울 것이 없었다라고 하여 서로 반대의 보고를 했던 것은 그 까닭에 대해서 황은 西人(서인)이요, 김은 東人(동인)이라.

동서 당쟁의 소치로 그같이 서로 반대되는 말을 했던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이 역사적인 통설인 바 그 때문에 국가의 정책수립에 근본적인 방향 착오를 가져와 필경 민족 전체로 하여금 큰 환난을 만나게 했던 결과는 천추의 한을 남기고 씻지 못할 역사의 허물이 아니었던가?

현실은! 임진왜란 그것은 침략이 아닌 출병이라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일본 역사 교과서 왜곡을 바라보며 분노와 비통을 금할길 없다. 국가는 일체의 타협을 거부하고 옳은 일을 위하여 칼날을 밟으며 의인의 길을 걸은 3 1운동 당시 선열의 정신으로 대응해야 할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