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진군 항만의 역사
당진, 한진의 명성에 남은 포구의 대역사
이대로 맥을 끊을 것인가
당진군은 현재 52㎞의 해안선을 갖고 있으나 삽교방조제, 대호방조제, 석문방조제 등이 준공되기 전에는 해안선이 86㎞에 달하였다. 따라서 당진군의 역사는 바닷가의 포구, 즉 오늘날의 항구와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다.
-삼국-통일신라시대 대당교역의 창구 당진(唐津)
당진이라는 지명의 사용은 이 지역이 일찍이 당나라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음을 엿보게 한다. ‘唐津’은 ‘당나라로 가는 나루’라는 의미다.
김정호에 의하여 편찬된 와 에 의하면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덕물도(德勿島)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당진에 상륙하였다고 한다.
당진군 대호지면 적서리 방구암(防寇岩)의 전설에 의하면 삼국시대 당군이 서해의 덕몰도에 주둔했다가 일부 병력은 송악면 한진으로 상륙하고 일부는 난지도 경유 내륙으로 침입하기 위해 상륙한 곳이 방구암이었는데 당시 백제군이 이를 알고 사전에 대기하고 있다가 상륙하는 당군을 격퇴하매 그들은 강 건너편 당진포리(唐津浦里 ; 현재의 당진군 고대면)에 상륙하였다고 한다.
통일신라 경덕왕 때 종래의 벌수지현(伐首只縣)이 당진으로 개칭된 것은 이곳이 당나라와의 활발한 교역창구로 활용되었음을 추측케 한다.
백제시대 당진의 명칭인 벌수지현(伐首只縣)도 신태현 교수의 삼국사기 지리지 연구에 의하면 뱃재로 나와 있으니 배와 관계되며 따라서 배가 나타나므로 항구 부두 나루터와 관련된 것으로 추축된다.
-조선시대 해안방어기지 당진포(唐津浦)
중국의 원나라 이후 실시되는 해금정책(海禁政策)으로 바닷길이 막히면서 고려 후기부터 조선시대까지 당진은 더이상 대외교류의 창구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고 대신 해안방어의 중요기지로 부각된다.
여말(麗末)부터 왜구(倭寇)가 해안가에 빈번하게 출몰하자 조선시대에는 당진포에 수군만호를 설치하였다(소근포 진관에 소속). 원래 초기에는 당진만호가 박지포(朴只浦 ; 당진 현조에 의하면 박지포는 당진현 치소로부터 북쪽으로 34리 거리에 위치)에 머물렀으나 아마 진관체제(鎭管體制)를 정비할 때 당진포로 옮긴 것으로 추측된다.
당진만호 휘하에 배치된 군선과 군정은 다음과 같다.
-세종실록지리지 : 병선 13척, 선군 790명
-조선전기 : 대맹선 2척(선군 160명), 중맹선 7척(선군 420명), 소맹선 2-척(선군 90명), 무군소맹선 4척 등
-조선후기 : 방선 1척(선군 60명), 병선 1척(선군 30명), 사후선 1척 등
당진포영에는 조선 중종 9년에 돌로 쌓은, 주위가 1천340척이고 높이가 9척인 당진포진성이 있었다.
김정호에 의해 편찬된 와 에 의하면 당진은 임진왜란 때에도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陣璘)이 절강성으로부터 병선 500척을 거느리고 와서 정박했던 곳이라고 한다.
-여말선초 세곡의 집결지 범근내포(犯斤乃浦)
범근내포(犯斤乃浦)는 현 당진군 우강면 강문리 부리포(富里浦)에 있던 삽교천의 포구로, 여말선초에 충청우도의 세곡이 집결하던 포구였다.
면천의 범근내포에서 홍주목, 공주목 관할의 조세를 받아 서울 경창으로 조운하게 되었다.
범근내포는 조선후기 충남 서북부지역(이중환의 에 의하면 가야산 자락의 10여 고을)을 지칭하던 ‘내포(內浦)’의 지명유래가 되는 포구로 추측되고 있다.
-조선시대 내포지역과 중앙을 연결하던 커다란 항구
대진(大津) - 지금의 한진
현재의 당진군 송악면 ‘한진(漢津)’은 조선시대에 ‘대진(大津)’이라고 불리워졌다.
대진(大津)의 포구에는 왜구가 해안에 자주 출몰하던 여말선초에 수군만호가 설치되어 있었으며(조선초기 세조조까지 존속), 에 의하면 만호 휘하에 병선 13척, 선군 794명이 배치되어 있었다.
대진은 조선시대 홍주목의 월경지인 신평현에 해당했던 곳으로 주위에 당진현과 면천군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변 고을에 편입되지 않고 큰 고을 「홍주목」의 월경지로 남아있게 된 것은 그만큼 (항구로서) 중요한 지역이었다는 의미이다.
인조가 이괄의 난으로 공주의 산성으로 몽진할 때에 조정에는 ‘대진(大津)을 건너 내포(內浦)로 갈 것’을 고려하기도 했었다.
김정호의 에서는 ‘대진의 이남(以南)을 통칭해 내포’라고 했으며, 의 도로망에 의하면 이곳에서 평택의 포승면 만호리 포구에 이르는 뱃길이 내포와 서울을 연결하는 큰 길이었다.
-지명에 아직도 많은 포구(浦口)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당진(唐津)
당진의 현존 지명에는 다음과 같이 과거에 포구(항구)였음을 알 수 있는 곳이 많이 있다. (한글학회, 1974)에서 발췌한 것이다.
당진읍·고대면·대호지면당진포리(唐津浦里), 옥현리 삼포(三浦), 진관리(眞館里) 관동(館洞)·국말[국촌, 원진관], 우두리 북창포(北倉浦), 원당리 석포(石浦), 적서리 뱃말[선촌]·석포(石浦), 조금리 조금나루(造琴津), 출포리(出浦里), 날개나루터[조갯굴나루터]
석문면삼봉리 웅포(熊浦), 삼화리 동심포(同心浦, 東心浦)·보덕포(普德浦), 통정리 곰개[웅포, 밧곰개]
송산면가곡리 두포(斗浦, 두멍개)·칠성포(七星浦), 무수리 화포[고잔]
송악면복운리 복포(伏浦, 복개), 석포리 객포(客浦, 객개), 한진리 대진(大津, 한나루, 나루머리, 한진)
신평면남산리 만동포(萬同浦), 운정리 공포(孔浦)
우강면강문리 부리포(富里浦), 공포리 공포(孔浦), 대포리, 부장리 남원포(南元浦), 세류리 우포(牛浦, 소개), 소반리 소포(小浦, 소펀), 송산리 상포(上浦)·중포(中浦), 하포(下浦), 신촌리 가포(佳浦, 가판)·굴포(屈浦, 굴깬)·부리포(富里浦, 수문통)
합덕읍대합덕리 개안[浦內, 浦內里], 신리 하포(下浦, 아랫개안, 하신, 하개리, 하개), 신흥리 독포(獨浦, 독개)·독포진(獨浦津, 독개나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