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최 평 곤
상록문화제는 막을 내렸지만 당진이 상록문화제를 계기로 낳은
심훈문학상의 첫 당선작에 대한 관심과 궁금증은 여전히 높기만 하다.
이번 심훈문학상의 심사를 맡았던 우리민족문학의 대가
김병걸, 남정현 선생도 심사평에서 말했듯이 이 작품은 평범하지만
독립심이 강한 한 여성의 이야기로 심훈과 상록수 관련 부분이
유려한 문체를 타고 작품속에 잘 용해된 품격있는 작품이다.
당초 연재할 계획이었으나 주간신문인 관계로 이야기 연결이
어려울 것이라는 점을 감안해 여기에 전문을 게재한다.
문학을 사랑하고 심훈문학상을 뜻깊게 생각하는 주민·독자
여러분께 아무쪼록 소중한 기록이 되길 바란다. /편집자주/
공원아래에 자리를 잡은 포장마차에서 소주를 마신다. 비가 내린다. 안에만 틀어박혀 있었던 탓에 비의 정도를 파악하지 못했었는데 제법 빗줄기가 굵다. ‘후두둑...’숨어 버리기 위해 급히 달려가는 발자욱 소리, 가슴이 뛴다. 포장마차지붕이 금새 아래쪽으로 배가 불러 온다. 주인 여자가 불러 오는 곳을 눌러 고인 물을 지붕에서 밀어 내리지만 이쪽 기둥이 휘어질라치면 저쪽이 늘어진다. 비는 지금 그녀의 심사처럼 누군가를 놀려 주고 싶은 심정인가 보다. 놀려줄 뿐만 아니라 세상을 아주 박살내고 싶은 것인지 뉴스에선 경기 북부 지방에 사람이 죽고 실종자가 생기고 농경지가 잠기고 재산상의 피해가 늘고 있다고 한다. 먼 나라 아틀란타의 소식도 가끔 전한다. 추가 되어가는 금메달의 숫자와 늘어가는 사망자의 소식이 그녀의 머리 속에서 매일 장만하는 식탁의 메뉴처럼 뒤섞였다간 금방 사라져 버린다.
그녀는 빗줄기를 바라본다. 한 발자욱만 밖으로 내 디디면 비속으로 빨려 들어가 평소의 소원처럼 비의 일부가 되어 휩쓸려 갈 그런 기똥찬 위치에 앉아서 말이다.
비가 내리면 좋았다. 밖으로 나가야 할 일이 많을때, 그냥 방 구석에 처박혀 있고 싶을 때 비가 오면 신났다. 이유가 뭔지 모를 열등감에 쌓여 부글부글 끓어 오르는 것들을 참아 내야 했을때 까닭도 없이 성이 차지 않아 좌불안석할 때, 누군가가 몹시 그리운데 아무도 찾아주지 않을때 한통의 전화만으로도 해결될 수 있는 문제를 그 한통의 전화조차 허용하지 않는 자존으로 세상 밖으로 떨어져 나가는 듯한 고통을 겪고 텅텅텅 속이 비어 쓰러질 것 같을 때 곰곰히 생각해 보고 나면 결국 모든일의 발로는 자신이며 해결해 줄 수 있는 사람도 자신 뿐이라는 지극히 평범한 상식을 터득했을때 그보다 그따위 상식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렀을 때 솟아나는 심술은 비를 좋아했다. 그래서 비가 내리면 가능한 한 모든 빗줄기 빗소리들을 놓치려 하지 않는 것이 습관이다.
비가 내리면 그 일만으로도 할 일이 생겨지는 것이다. 비가 즐겨 내려 앉는 곳들을 찾아 보기도 한다. 그녀의 사무실에선 유리창이었다. 비들은 아이들이 사탕이나 장난감을 들고 있는 사람에게 달려 들듯이 유리창으로 달라 붙는다. 그리고 또 여기선 대추나무 잎을 좋아 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나무마다 가슴께에 불을 밝힌 가로등을 안고 있어 가로등 주변의 빗줄기들이 선명하게 보여진다. 그중 유독 대추나무 잎파리에 내려 앉은 비가 반짝이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불빛에 비친 빗방울은 맑다. 그녀의 앞에도 같이 온 사람이 따라 주는 빗물같이 맑은 소주가 있다. 얼마나 마신 걸까? 아직 취기가 없다. 그저 비를 관찰할 뿐이다. 소주는 잔이 비워지면 다시 채워진다. 같이 온 사람이 의무적으로 배려를 하는 것이다. 그는 그 일이 좋은 걸까? 그녀를 옆에 앉혀 놓고 소주를 마시는 일, 차에 태워 싣고 다녀 주는 일, 그녀를 돌보아 준다는 생각으로 언제나 동행하는 것, 보이지 않게 실소를 한다. 그것들은 겉으로 보여지는 현상일 뿐이고 그녀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자유였던 것이다. 그로부터 벗어 나는 일 무한대의 공간에서 날개를 펴는 일 아! 얼마나 자유로울까? 공기와의 접촉 얼마나 부드러울까?
동행인이 말하는 소리를 듣는다. 이 시간까지 수도없이 대꾸를 했던 것이다. 그가 여러 곳의 포장마차 여러 유형의 유흥업소를 제치고 이 곳을 선택한 이유는 그녀를 배려한 것일 것이다. 그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의 배려는 곧 그녀를 구속하는 것이라는 것을. 그 구속에서 그녀는 벗어날 수 없다는 명백함을 그러므로 한켠에서 솟아나는 동정심이 자주 이런 자리를 마련하게 되는 것이라는 것을..... 벗어나려는 심리는 감시가 심할 수록 더 하는 법이다. 그녀는 한가지 방법을 스스로 터득해냈다. 조롱속 새처럼 바깥 세상을 차단하는 철망은 생각하지 말 것 공간의 범위 내에서 이룰 수 있는 평온을 유지해 갈 것 꿈이 실현되는 순간을 위하여 자유를 누리는 연습을 비교적 철저히 해 둘 것, 그러므로 오늘도 주고 받은 말들의 의미를 쉽게 버리며 그녀가 누리고 싶은 세계를 여행하고 있는 것이다.
안주를 두 번 시켰고 소주가 두 병이 비워졌다. 그녀는 남편에게 말했다. 공원 안으로 가 보자고... 그 곳으로 데려다 주었다. 차 속에 앉아 비 소리를 듣는다. 비는 세상을 채우는 내용물이라고 생각했다. 비어 있는 공간과 공간을 베개속의 메밀껍질처럼 알맞게 채우고 모든 잡음들을 하나로 정제시켜 베에토벤 바하보다 아름다운 소리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붕의 양철판을 때리는 소리 후련하다. 꽃다운 나이에 땅 속에 누워있는 한 여인에게로 통하는 계단을 본다. 빗물이 폭포를 이루어 계단을 타고 내려 온다. 이 공원 한쪽 구석에 둥그런 무덤을 영원한 숙소로 정하고 누워있는 여인은 최용신이다. ‘상록수’라는 소설 속의 주인공 채영신 말이다. 그녀가 자주 이 공원을 찾는 이유도 또 그녀의 남편이 자주 이곳에 데려다 주는 이유도 바로 그 최용신이라는 여인이 누워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신도시의 바람이 불며 그녀가 이곳으로 찾아 왔던 때가 6년 전이다. 그 전엔 기존의 도시 서울에서 살았다. 그 곳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제 나름의 범위들을 구축하고 있었다.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듯 빽빽히 채우고 그 위에 덧칠하고 메끼까지 입혀 놓아 그녀가 스며들 틈이라곤 없었다. 그녀의 물감들은 코팅된 표면위에서 번번히 미끄러져 내릴 뿐이었다. 그런 가운데 신도시는 그림을 그릴 수 있게 주어지는 백지처럼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의미로 등장하는 것이었다. 새로 만들어지는 도시, 사람들이 새로이 모여 새롭게 설계 해 나아가는 도시, 빈 자리가 많은 곳.... 휩쓸려 뭔가를 이룰 수 있을 것 같아 여기 안산으로 터전을 옮기게 된 것이다.
당시에는 평원위에 그녀가 깃들 닭장같은 고층 아파트만이 덩그렇게 서 있었다. 그러나 그녀를 비롯하여 모든 사람들은 잠시 즐거웠다. 새 가구를 들이고 꿈을 장식하고 저마다 넓디넓은 공간에 마음껏 자신들의 밑그림을 그리느라 바빴다. 시간은 저 혼자서도 잘도 걸어갔다. 그러나 곧바로 찾아 오는 불편함은 실생활에서 오는 문제들 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파고 드는 문화적 고갈,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 더 강하게 대두 되는 것이었다. 황량한 벌판에 우뚝 세워진 고층아파트는 간혹 영화에서 보는 문명시대에 공룡이라도 등장한 것처럼 또는 타임머신을 타고 고대로 들어간 문명인들의 모습처럼 해괴하고 낯선 풍경이었다. 그런 것들이 자꾸만 잃어버린 대 도시의 일상의 자리에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부터 점차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시기적으로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들려오는 소리로는 1, 2년 후면 도시가 완벽히 조성되어 그런 불편들은 사라질 것이라고 했지만 유배생활같은 당시의 심정으로 2년 후란 인생이 다 소모되고 날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당장 해결해 줄 수 있는 무엇이 필요했다.
때를 맞추어 사람들의 입만을 골라 딛고 다니는 소리가 있었다. 이곳이 ‘상록수’라는 소설의 발상지라는 것이다. 귀가 번쩍 띄었다. 실제로 소설 속의 주인공 채영신이가 그녀의 본명 최용신으로 활동했던 교회가 그대로 있다고 했다. 그녀가 묻혀 있는 무덤이 이 곳에 있다고 했다. 그녀는 가뭄에 물을 만난 고기처럼 소리가 가르키는 곳으로 서둘러 찾아갔다. 뜻밖에 평상시에 서울로 가는 전철을 타기 위해 지날 때마다 보아왔던 곳이었다. 잡초더미 위에 유난히 길고 빨간 지붕의 교회가 있는 곳, 바로 그 곳이었다. 깊은 시골에서나 볼 수 있는 옛스런 모습 그대로 그 안에 관리인이라도 있는 걸까? 새 아파트 주변으로 금방금방 신축되어 지는 크고 번듯한 교회들에 밀려 신도들이나 있는 걸까? 하는 궁금증을 일게 했던 곳 더구나 개발되고 있는 이 지역조건으로 헐려 버리는 것은 시간 문제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했던 곳이 바로 그 곳이었다.
그러나 평상시의 그런 감정들은 그 사실을 알고 난 후부터 신속히 바뀌었다. 옛스런 모습은 당연한 것 같았고 잡초뿐인 주변은 오히려 고층건물들이 신속하게 들어서는 현대에서 40년전 일제치하에서 농촌운동을 펴던 때로 인도 하는 매개체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을 하게 하는 것이었다. 아직도 그 시대의 사람이 한명쯤 남아 관리하고 있는지 교회마당은 깨끗이 정돈되어 있었다. 약수라고 써 있는 수도 꼭지가 꼭 시골의 마당가에 있는 우물터이다. 주변에 시멘트로 낮게 둑을 쌓아 물이 함부로 흐르는 것을 막은 모양이 꼭 그렇다. 남의 집을 엿보듯 들여다 본 교회 안은 밖에서 짐작하기 보단 꽤 넓은 편이었다. 그리고 잘 정돈되어 있었다. 그 곳에서 사람은 만나지 못했다. 밖으로 나와보니 외벽들은 색이 바래져 있었고 상록수 몇 그루가 서 있었다. 그 시대에 심었다는 말처럼 줄기가 뒤틀리며 굵게 올라가 상단 부위에는 침엽수들이 모여서도 커다란 그늘을 만들어 낼 만큼 무성하다. 나무밑엔 최용신을 기리는 기념비가 있었다. 1985년 11월 샘골 부락민 홍석현 외 36명과 담임 목사 백만국이 세운 비에는 신도시로 이 지역이 개발되더라도 용신의 정신은 살아 면면히 전해지기를 바라는 글과 서울대 교수 유달영선생이 쓴 글이 쓰여 있었다. 또 이흥래 외 39명의 제자들이 세운 비도 있다. 그런 기념비를 보고 나서야 그것이 그녀가 이미 학창시절 배운 바 있는 ‘상록수’ 그 소설의 발상지가 틀림없음을 실감했다. 옆으로는 그녀가 몸담아 아이들을 가르치던 학당이 기울어져 곧 쓰러질 것 같은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다.
‘이렇게 버려 둘 것인가? 꼭 귀신이 살고 있는 창고 같구나’
‘이 교회에 목사는 있는 걸까?’
옛 학당을 거슬러 내려 오면서 오솔길이 나타났다. 시멘트 보도블럭 두세조각이 죽 연결 된 오솔길이다. 그 옆으로 우리나라 뒤뜰에서 볼 수 있었던 정겨운 꽃들이 양쪽으로 줄지어 피어있다. 귀신에게 홀린듯 넋이 빠져 길을 따라갔다. 언덕 아래로 이어졌다 200m남짓 갔을까? 무덤 두개가 나타났다. 봉숭아꽃 분꽃 채송화가 이어진 길 끝에 무덤 두개라니... 가까이 가 살펴보았다.(꽃다운 나이로 이곳에 눕다...) 옆에는 (상록수의 약혼자 김학준의 묘)라고 쓰여진 묘가 하나 더 있었다.
‘약혼자?’용신이 원했던 것일까? 약혼자라는 사람이 원했던 것일까? 아니면 후세의 사람들이 임의로 무덤을 함께 모아 놓은 것일까? 마음 속에 새로이 꼬리를 무는 궁금증을 지닌 채 내려왔다.
이후부터 그녀는 혼자의 시간이 필요할 때면 그 공원을 찾는 것이 습관이 되어 버렸다. 아득히 먼 2, 3년 후의 문화적 혜택이 저승의 일처럼 길게 느껴질때, 아이의 손에 쥐어진 풍선처럼 보이지 않는 끈이 연결된 범위에서 벗어나지 않는 유일한 도피처가 된 것이다.
그녀의 아침시간은 바쁘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남편을 출근시키고 어수선한 집안을 정리하기까지. 그러고 나면 식구들 중 누가 돌아 올 때까지 혼자 지내야 한다. 이젠 이웃의 아낙네들과 나누는 비어있는 대화에 염증이 났다. 영화를 보러 나가는데도 음악회나 연극 한 편을 보기 위해서도 전철역까지 걸어 가서 외가집 가듯한 시골길을 마냥 지나 서울로 가야 한다. 그럴 때면 빈집을 슬며시 빠져나와 천곡공원으로 간다. 저녁무렵 공원의 황혼은 너무나 아름답다. 서해에 접해있는 안산은 여름에서 가을까지 바다에 빠져드는 저녁해이거나 서산을 물들이는 경우이거나 노을이 져 아름다운 곳이다. 그녀가 어릴 적 살던 곳도 서해에 인접해 있었다. 충남 당진군 합덕면... 왼종일 해를 잊고 있다가 서산이 빨갛게 물드는 저녁이면 모두들 하루를 접으며 낯익은 식구들을 대하듯 해를 의식하는 것이었다. 8살 10살의 어린아이의 가슴속에 들어와 오랜 세월 갇혀있던 노을이 나이 40이 넘어 이곳 안산에서 살아 나와 다시 온 세상을 물들이는 것같은 가슴 벅찬 심경에 들곤 한다.
천곡공원의 언덕에서도 그 해가 잘 보인다. 천곡공원에는 커다란 상수리 나무도 한그루 있다. 아름드리 아카시아 나무도 한그루 있다. 꼭 한 그루씩 있는 나무들 밑에는 꼭 한개씩의 벤취가 놓여 있다. 그녀가 쉬는 장소는 대부분 용신의 묘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바지 아카시아 나무 아래 벤취이다. 어디나 그렇듯 이곳에서도 아파트에서 소풍나온 사람들로 붐빈다. 그녀처럼 문화적 고갈에 목마른 사람들일까? 그들은 약수가 나오는 우물가 주변에서 물을 받던지 혹은 배드민턴이나 볼을 던지며 시간을 보낸다. 천곡이라는 말은 샘 천자, 골 곡자 ‘샘골’이라는 말이란다. 약수를 받으러 온 사람들이 나누는 말을 들은 것이다. 옛부터 이곳은 샘골이라고 불리워졌던 만큼 물이 맑고 좋다고 했다. 물만큼 맑고 좋은 노을을 보며 무덤가를 돌아 내려오는 것이 그녀의 일과가 되었다. 이젠 봉숭아 분꽃보다는 코스모스가 더 많이 피어있는 길을 따라 무덤가에 이르렀다.
한 남자가 깨끗한 남방차림으로 앉아 있다. 몇번 그런 모습을 본 것 같다. 묘 주변 잔디를 돌보는 사람 말고는 아무도 찾아 올 것 같지 않은 무덤 주위에 나타난 낯선 사람, 두어 번은 예사로 지나쳤다. 서너번의 횟수에 이르자 관심이 쏠린다. 따라서 엿보듯 훔쳐보고는 발소리를 죽여 내려왔다. 그도 그녀를 그렇게 살피고 훔쳐 보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짐작 뿐인데도 몇일간 그곳에 오르지 않았다. 그녀만의 비밀스런 장소를 빼앗긴 것같은 생각이 들었다. 다시 공원으로 갔다. 아카시아 나무 밑에 이르러 무덤 쪽을 엿보았다. 그가 있었다. 깨끗이 푸세한 모시메리 셧츠차림의 그가 서쪽으로 지는 해를 바라보며 그 자리에 있었다. 그녀는 아카시아 벤취에 자리하고 지켜 보았다. 이유없이 묘지를 찾았던 것처럼 호기심만으로 지켜보았다. 20분...40분...아카시아 나무는 참으로 크다. 밑부분의 줄기가 어린이의 아름으로 서너 아름은 될 것이며 키는 용신의 학당의 지붕을 훨씬 넘는다. 잎이 무성하고 그늘도 충분하다. 5월엔 주렁주렁 눈물방울같은 꽃을 단 것을 보았었다. 그도 장관이었다. 지금은 진초록 이파리로 한낮의 땡볕을 가리워 준다. 잎의 밀도로 햇살 한가닥 파고 들지 못한다. 그 웅장한 나무를 그녀는 즐겨 바라본다. 멀리서 혹은 아주 가까이에서 나무는 움직이지 않고 서 있다가 바람이 불면 흔들린다. 마치 춤을 추는 것 같다. 하루종일 기다리던 사람을 만나 기쁨의 춤을 추는 것 같다. 비단 옷자락 스치는 소리로 노래하며 잎들은 춤을 춘다. 아카시아나무는 춤을 춘다. 그녀에게도 그런 왈츠를 추게 해줄 누군가가 찾아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상념에 빠져 있다가 바라 보아도 그는 거기 있었다. 시간이 더 흘러도 움직일 것 같지 않았다. 집안 일에 맞추어 그녀가 먼저 돌아가야 했다. 그는 왜 그곳에 있는 것일까? 왜 그곳에 나타난 것일까? 그곳에서 그는 무엇을 생각하는 것일까? 그녀처럼 용신과 노을과 상록수를? 생각이 같은 사람을 알게 되는 것은 좋은 일일 것이다. 이제 그녀의 무료함의 촉수는 미지의 사나이에게로 하염없이 뻗는다.
그러나 그 일은 그녀가 새 일을 시작하게 되면서 곧 잊혀졌다. 전직 교사였던 그녀가 학생들을 지도하는 입시학원을 낸 것이다. 이 일은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온 후에 시작되는 일이어서 오전시간을 개인의 시간으로 쓸 수 있는 좋은 이점이 있기도 했다. 학원내에 자신만의 아담한 공간도 하나 마련해 두었다. 그리고 오전 시간을 이용해서는 자신의 공부를 위하여 대학에서 부설로 운영하는 교육원에 등록을 했다. 그림공부를 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학원은 얼마가지 않아 체계가 잡혔음으로 그녀는 새로 시작한 공부에 심취할 수 있었다. 잡념이 사라졌으며 뭔가 몰입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으로 즐거움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커다란 행운이었다. 이젠 동료의식을 갖게 된 사람들끼리 가끔은 파티도 연다. 이런 경우 지도를 맡고 있는 교수가 참여하는 것은 너무도 지당한 일인 것이다. 수강생들 중에는 그녀 또래의 남성들도 서너명 끼어 있었다. 지금까지 그녀는 미술에는 관심이 별로 없었던 터였다. 우연히 ‘다다’라는 책을 읽게 된 후 ‘다다’의 구성원들 중 화가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던 것이 새로운 관심사가 되어 그림을 대하다 보니 직접 그려보고 싶어지기에 이른 것이다. ‘다다’라는 책에 의하여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이 동기인 만큼 실기외에도 그녀는 이론적인 면에도 관심이 많았다. 수업도중 교수에게 몇가지 알고 싶은 것들을 묻게 되었다. 지도 교수가 친절히 안내하면서 미술에 관한 이론도 좋지만 예술을 이해하는 차원에서 미학에 관한 책을 읽어보는게 어떠냐고 권했다. 그중 한두권의 책이 자신의 작업실에 있으니 빌려다 보아도 좋다고 했다. 회원들 몇명이 그룹이 되어 화실을 방문하기로 했다. 첫 방문이었다. 겉으로는 지극히 평범한, 구실에 의한 방문이었지만 저마다의 내면에는 독신의 대학교수라는 고급 직업의 남성을 방문하는데 일 수 있는 호기심들을 최대한 간직하고들 있었다. 약속 되어 있는 날까지 흥분된 상태에서 화제가 그곳으로만 몰아지는 것으로도 당일 저마다의 가슴에 안겨 있는 꽃다발과 화사한 몸치장들로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녀만이 화장기 없는 얼굴로 빈 손으로 등장했다. 이런 모습으로 확실히 위장되었는지 모르지만 사실은 그녀의 내면에서도 그런 호기심은 그들과 똑같은 비례로 일고 있었다. 절도 있으며 근엄한 행실을 하는 외국에 가족을 두고 혼자 사는 남자 특히 명문대 현직교수이며 사회에서의 지명도도 필요한 만큼은 확보하고 있는 사람... 모두들 정중하게 들어선다. 흐트러짐 없는 태도로 그러나 6개월 남짓 지도해 온 학생들에게 대하는 교수의 태도는 자연스럽다. 특별한 분위기 속에 마련된 탁자에서 커피한잔씩 뽑아 든 채 모두들 작업실로 안내되었다. 그녀도 뒤따랐다. 들어 오기 전까지 내부에서 일던 호기심은 이젠 절로 퇴색되어 가고 있었다. 앞 다투어 튀어 보이려는 사람들의 보이잖는 경쟁에 눌려 스스로 물러서고 있는 것이다. 집중해야 할 일이 사라지면 잡념이 시작되는 것은 오랜 그녀의 습성이다. 자유자재로 의지를 펼 수 있는 상상의 세계에 들어 가는 것은 이미 흥미를 잃어버린 이런 분위기 보단 돌아가 혼자의 시간에 파묻히는 편이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나 색감이 참 독특해요.”
“기법이 아주 독창적인 것 같아요. 잘은 모르겠지만 호호호” 저 영양가 없는 말들은 호기심이 해소될때까지 시간을 유지해 가는데 필요할 것이다. 그녀는 빨리 돌아나와 분위기 있는 탁자에 앉아 쉬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을 하며 일행보다 한발 앞서 전시벽을 둘러 보았다. 이상한 그림들을 발견했다. 너무나 낯이 익은 풍경들이 그림 속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저 나무는 어디선가 많이 본 것 같아’하는 생각을 하며 발을 멈추어 자세히 살폈다. 상수리 나무다. 가슴에 커다란 구멍하나 뚫린 키가 큰 상수리 나무다. 그리고 벤취에 머리카락만 길게 드리워져 있는 슬픈 표정의 한국형 처녀귀신 같은 여인이 앉아 있다. 슬픈 표정의 귀신이다. 그리고 그 다음 그림은 무덤이다. 둥그런 무덤 안에 표정 없는 여인의 얼굴이 어리어 있다. 선명하고 뚜렷이 그려진 것이 아니라 어리어 있는 것이다. 또 한장의 그림에는 잡초 속에 묘비가 누워있다. 그 속에 빨갛게 물든 열기가 식어 있는 태양이 그려져 있는 무덤이 또 있다. 다른 또 한장의 그림에는 두 남녀가 자신들의 시신이 들어있는 무덤을 들고 어딘가로 가고 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여인의 신체 각 부위가 나뉘어져 나무에 걸려 있는 그림도 있다. 나무의 밑등 부분이 꼭 어디선가 많이 본듯하다.
‘어디서일까.’생각하다가 마지막 그림에서 뾰족탑을 보고서야 아! 그곳을 기억해냈다. 그건 천곡교회의 뾰족탑이다. 선명한 빨간색의 유난히 긴 뾰족탑. 색이 바랜 몸체부분은 그림에 나타나 있지 않다. 뾰족탑과 상수리 나무와 무덤들... 그녀는 너무나 놀랐다. 그러나 놀라움은 그녀의 안에서 커다란 굉음을 냈을 뿐 밖으로 나오지는 않았다. 이후의 시간들이 어떻게 지났는지 기억에 없다. 집에 돌아올때까지 그녀가 무료함에 빠져 자주 찾던 천곡교회의 공원과 최용신의 무덤앞에서 장시간 앉아 있던 사람 그녀만의 공간을 빼앗아 갔던 사람만이 떠 오를 뿐이었다.
다시 용신의 묘를 찾았다. 용신이 죽으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죽거든 학교가 잘 보이고 종소리가 들리는 곳에 묻어 달라” 그 말대로 그곳에 묻힌 것이라고 했다. 그녀의 행적은 물론 사실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일들은 그녀가 원했던 것일까? 그녀는 진정으로 그 일에 가치를 느꼈단 말인가? 혹, 명예를 쫓는 부류는 아니었을까? 여러가지 쓸데없는 생각들이 인다.(꽃다운 나이에 여기 잠들다...) 라는 말이 또 떠오른다. 꽃다운 젊은 나이에 마지막 순간에도 후회하지 않았을까? 교과서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우리들은 아이큐가 모자라는 사람이라고 한다. 용신도 그런 측에 속하는 사람이었을까?
그녀는 힘들다. 결혼 후 한번도 자신의 의지대로 이루어 본 일이 없다. 이 공원을 벗어나면 몇 시간을 보내는 일도 행방과 용무를 밝히지 않고는 어려운 일이다. 그녀는 자유를 소유하고 싶어한다. 하고 싶은 일을 하고 만나고 싶은 사람 지칠때까지 만나고 돌아오고 싶을 때 돌아와 쉬고 싶을 때까지 쉬고 가고 싶은 곳엔 언제고 어디고 갈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은 거다. 벗어 나고 싶은 거다.
아카시아 나무 아래 벤취에서 노을을 본다. 유년 시절의 고향의 노을도 꺼내 보았다. 그러나 관심은 묘지 쪽 모시메리 남방셔츠의 사나이를 찾는 쪽으로 자꾸만 기울어진다. 30분, 40분... 한시간이 넘어도 나타나지 않는다. 다음날 교육원으로 갔다. 그는 평상시대로 수업을 진행했다. 도무지 그림 속의 내용이 궁금하여 진도를 낼 수가 없다.
‘무덤 속의 얼굴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그 사람이 이 사람인 것이 확실할까?’ 옆모습과 뒷모습 만으로는 남성이라는 것 외엔 나이나 대충 짐작 할 수 있었을 뿐 단정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녀가 그가 이 사람이라고 추측하는 것은 그림 속의 내용에 의한 짐작일 뿐 확실한 것은 아직 아니다. 의혹에 쌓여 제한된 시간은 감각도 없이 지나가 버렸다.
저녁무렵 다시 공원으로 갔다. 최용신에 관한 일이 궁금해서가 아니라 주변에 사람이 나오는가를 확인해 보기 위해서였다.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와서 내일은 물으리라. 수업은 주 2회였다. 다음 수업까지 3일을 더 기다려야 한다. 회원들에게 수소문해 전화번호를 입수했다. 심장의 맥박소리를 들으며 다이얼을 넣었다.
-신호음 소리.
“여보세요”
“... ... ... ...” 다시
“여보세요”
“저 교육원에서 교수님의 강의를 듣는 문숙입니다. 한가지 여쭤볼 게 있어서 전화드렸습니다”
“허허 꼭 그런 용무가 아니라도 전화는 언제나 환영입니다. 그런데 뭐가 궁금하시지요?”
“교수님 작업실에 무덤이 그려져 있는 것 말인데요 그거 혹시 최용신의 묘를 그린 것이 아닌가요?”
“아 예 그거 말인가요?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적중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 ... ... ...”
“그렇습니다만... ...”
“... ... ... ...”
“그런데요?”
놀라운 듯한 어감으로 반문한다.
... ... ‘그런데요 그런데요’ 그런데 뭐가 어떻다는 말이냐는 것일 거다.
‘그런데요’ 이후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가 순간 당황하고 말았다. 그래도 그냥 끊을 수는 없는 일이다.
“뭐 별일은 아니구요 그림을 보는 순간 그런 생각이 들어서 궁금했었거든요. 감사합니다.” 일방적으로 수화기를 놓았다. 수화기를 들고 계속 이어지는 이야기에 대응해 갈 아무런 준비가 없었던 것이다. 그냥 그것이 궁금했을 뿐이다. 수화기를 내리고 나니 혼자임에도 불구하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걸 확인해서 어쩌겠다는 것이었을까? 무엇 하고져 확인하려 했던 것일까? 심한 후회로 혼란스런 시간을 보냈다.
수강일이 다가오자 망설여야 하는 번거로움이 또다시 발생했다.
‘가야 할까?’
‘가지 말아야 할까?’ 누가 어쩌라는 것도 아닌데 해괴한 현상이 일어난다. 누구와 의논해 볼 대상의 문제도 아니다. 그 교수는 벌써 관심을 버리고 까맣게 잊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인데, 예전의 산책도 그가 나오지 말라고 했던 것도 물론 아니었다. 그냥 무관심의 상태로 계속 진행할 수 있었을 텐데. 빼앗긴 것 같은 억울한 감정으로 나가지 않은 것은 스스로 행한 일일 뿐이었다.
‘갈까? 말까?’ 지금 이 망설임도 혼자만의 일인 것인데... ... 왠지 대상도 없는 억울함이 잠시 인다.
‘무슨 관계야 나가서 내 일만하고 돌아오면 되는거지’ 마음을 정하는 데에도 용기가 필요했다. 그리고 나갔다. 열심히 작업을 했다. 그가 다가왔다.
“어떻게 그 그림의 내용을 알아냈지요?”
‘그도 궁금하기 시작했구나 나처럼’ 너무나 쉽게 해결하려 한다. 잠시 머뭇거렸다.
“깜짝 놀랐습니다. 그림을 어떻게 알아 보셨나 하구요. 제목이 붙어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
“언제부터 공원에 나가시지 않았나요?”
“아 그건 또 어떻게?” 뒤에 시간을 잡아 차를 같이 했다. 그가 시도한 일이다. 흥미가 돋았다. 신도시로 이사올때처럼 새 아파트에 입주할 때처럼 새 일을 시작 할 때처럼 새로운 기대가 부드러운 촉수를 가슴 속 깊이에서 내밀고 있는 것이다. 그 그림에는 별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그냥 이 지역에 오니 지역을 상징 할 만한 장소가 되는 것 같아서 시도해 보려 했으나 감흥이 일어 시작한 일이 아니어서 성과가 없었다고 했다. 10여편의 그림을 남기고 무덤가를 지키는 일을 그만두었다고 했다. 그녀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놀랐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리고 이렇게 다시 만났으니 보통 인연이 아닌데?” 하며 말을 낮추었다. 그녀보다 10여년 연배인 것이 이미 파악된 사실이다. 싫지 않았다.
애초부터 그림은 그녀에게도 별 의미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용신에 관하여 솟던 의문들도 약해졌다. 그녀의 가슴 속에서 새로운 설레임이 늘 존재한다는 것이 이젠 중요할 뿐이다. 다음엔 한번 공원에 같이 나가자고 한 일만이 기억속에서 다른 모든 잡념들을 밀어낸 채 자리하고 있다. 초조하고 설레이는 나날들. 무슨 큰 일을 저지르고 있는 듯 덮쳐오는 불안감과 가슴 떨리게 기다려지는 초조함이 뒤범벅이다.
언젠가 천곡교회 목사를 만난 적이 있다. 그녀가 자주 공원을 산책하던 때이다. 교회에서 마주쳤었다. 이것저것을 묻는 그녀에게 교회에 나와보지 않겠느냐는 권유를 했었다. 그녀는 유신론자이지만 반드시 교회에 나가야 한다는 논리에는 동의하지 않으며 따라서 계기가 없이 무의미하게 나갈 필요는 느끼지 않는다고 말했었다. 목사는 하느님의 존재를 납득시키려 노력했다. 그녀는 정중히
“저는 신을 믿습니다. 그러나 내가 알고 있는 신은 이기적이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뭘 하라고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무조건 벌을 내리지도 않습니다. 전지전능하시기에 사람보다 우월하며 모든 것을 다 알고 있기에 저의 마음 속도 누구보다 잘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내가 교회에 나가지 않는 이유도 목사님 보다 그분이 더 잘알고 있으니 염려하지 마십시오”라고 말했다.
목사에게 그녀가 알아내고 싶었던 것은 최용신 사망이후 천곡교회의 유래와 현재 운영 방법등이었을 뿐이었다.
그때 언급했듯 그녀는 그녀가 인정하는 그 신을 요즘 자주 부른다. ‘나는 어떠한가 이건 죄의 범위에 속하는 것인가. 삶을 바르게 사는 법 말고 가치있게 사는 법은 무엇인가’하는 것들을 수없이 질문한다. 그녀는 신을 향하여 솔직한 감정을 드러낸다. 간혹 사람들에게 드러내서는 안될 것들도 이미 다 알고 있다는 신 앞에선 당당히든 어쩔 수 없든 드러내야 한다. 그리고는 행동한다. 부끄럽지 않다고 생각되어질 때 자신에게 솔직하고 신 앞에서 솔직하고 그래도 행해야 하는 일들을 실행한다. 그것은 신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자신이 결정하는 일이지만... ... 신은 그저 방관하거나 덮어줄 뿐이다.
공원으로 나가는 일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나가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그를 만났다. 예술에 관하여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부족한 상식이 훨씬 더 풍부해졌다. 표면적으론 감사해야 할 일이다. 그는 스승으로서 당연히 할 수 있는 일들을 해 주었고 그녀는 많은 것들을 새로이 얻었다. 고대의 미술사에서 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흥미 진진한 일들을 해박한 그의 지식 속에서 덜어 그녀의 빈 그릇을 채워 주었다. 시간은 너무도 빠르게 지나갔다. 돌아 오는 길, 남모르게 그 시간 행복을 느꼈다는 것이 죄에 속하는 일일까. 신이여 이것이 죄인가. 저녁밥을 지으면서도 “현대미술사”를 펴놓고 읽어 내려가고 있다.
하루하루를 수강 날짜를 헤아리며 지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놀라기도 한다. 별일 아니다. 그림을 그리고 배우고 그리고 지향하는 부분들에 관하여 대화를 나눈다. 그 시간이 좋다. 처음엔 그와 함께 라는 것보다 그런 품위있는 시간들이 좋았다. 그러나 곧 그런 행복감은 다른 사람과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냈다. 아무리 수준 높은 대화를 좋은 분위기에서 나누어도 그와의 시간외에는 유리창 밖의 빗물처럼 안으로 스며들지 못했다. 스스로 전화하고 찾아가는 일도 많아졌다. 그는 한번도 거절한 적이 없다. 손님이 있으면 있는 대로 혼자이면 혼자인대로 맞이해 주었으며 그녀의 뜻을 들어 주었다. 문제는 그의 속 마음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뭘 알고 싶은 걸까’라는 질문을 자신을 향하여 해 본다. 그래서 알 까닭이 없다고 단정을 내리지만 지금까지 그의 마음에 관하여 알고 싶다는 생각은 사라지는 일 없이 계속된다. 뿐만이 아니라 만남의 횟수가 많아질수록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집요하게 뻗어 나오는 것이다.
그를 만나면서부터 시간이 너무나 빨리 지나간다는 것을 체험한다. 그럴수록 그녀를 제한하는 규제가 갑갑하다는 것을 느낀다. 돌아와야 하는 시간의 제한이 자신의 존재를 확인시켜 줄 때면 얼음 물 뒤집어 쓰는 오한을 느끼곤 하는 것이다.
그녀에게 주어지는 업무량은 많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업무의 조절은 그와의 통화가 끝나고 난 후에 이루어지는 새로운 체계가 생겼다. 새날이 밝으면 습관적으로 통화를 위해 신경을 쓴다. 걸려 오거나 걸어 보거나 뜻대로 잘 이루어지지 않을때는 모든 일들이 뒤섞여 버린다. 하루 종일 모든 일을 미루기만 하는 때도 있다. 그럴 때면 해결해 내지 못한 일들이 문제가 아니라 상한 마음이 병이 되는 것이 더 큰 문제가 되었다. 그는 언제나 변함없이 친절하고 다정하다. 그러나 어떤 것도 말을 해 전할 수도 없고 들어 알아 낼 수도 없다. 그는 궁금하지 않은걸까? 확인해 보고 싶지 않은 걸까? 그녀는 매일 음성을 듣던가 부드러운 표정을 대하여 다음을 약속하기 전에는 늘 불안에 휩싸여 보낸다.
그런 생활이 꽤 지속되었다. 안타까운 시간들이 즐거운 시간들보다 훨씬 더 많다. 10여년 멈추었던 일기를 쓰기 시작한 것도 그런 연유에서이다. 혼자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방법으로... ...
6/5 목
딸 아이의 학교에 가야 한다. 해야 할 일들이 오늘도 줄지어 서 있지만 잠시 미루어 두고 꼭 가야 한다. 평소에 엄마의 노릇을 잘 못하고 있는 것 같은 미안한 마음이 항상 붙어다녀 시간을 재고 따지고 살펴 볼 여유가 없다. 오늘은 전화가 와도 잠시 미루어야 한다. 다행히 전화는 오지 않았다. 내 쪽에서 걸지도 말자. 말없는 약속이 그로 인해 취소 될까 두려우니까... 학교는 꼭 가야 한다. 그래야 다소나마 미안한 엄마의 도리가 지켜 질 것같은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 참관 수업 도중 같은 일을 하는 김선생을 만났다. 김선생의 아들이 딸 아이와 같은 반 이라는 서먹한 사실을 알게 됐다. 훨씬 가볍게 시간이 흘러갔다. ...... 토의 학습, 학습형태가 우리 때와는 좀 변한 것이 다른 점일까? 미리 준비하고 맞추어 놓은 학습 창의성은 없어 보였다. 크게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왠지 쓸쓸하다. 선생님의 교육 방법도 그저 그렇다. 그러나 이 나라의 미래에 대한 걱정은 내 몫이 아니다. 다만 지금 난 초조히 시계를 살펴볼 뿐이다. 12시가 되기 전에 전화를 해야하는데...... 통화가 이루어 졌다. 12시 30분 경에 오라고 했다. 서두른 탓에 차를 인도와 차도 사이의 턱에 얹혀 놓아 바퀴가 움직이지 못했다. 이런 경우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오직 카 센터에 연락하여 사람을 불러야 한다는 생각 외엔. 카 센터에 연락을 해도 빨리 와 줄지. 시간은 자꾸 가는데...... 옆에 서 있는 차에서 사람이 내렸다. 나에게 몇가지 방법을 가르쳐 주었지만 잘 통하지 않자 본인이 직접 수고를 감행한다. 김선생을 시켜 연락을 취했다. 차체를 들어 올리는 도구를 꺼내 바퀴밑에 고이고 전진 후진 다시 내려 앞 바퀴를 조절하고 땡볕에 몇 십분을 사고를 일으킨 당사자에게는 심부름 하나 시키지 않고 수고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감사의 말, 보답의 방법을 찾기도 전에 휭하니 떠나 버렸다. 기분, 참 묘하다. 서둘러 김선생과 함께 그에게 갔다. 함께 점심을 했다. 쉴 새 없이 떠들었다. 하루 종일 기다려 온 만큼의 발산 이었을까? 그리움의 양만큼의 분출이었을까? 말을 많이하고 돌아온 날은 내가 버린 말들의 양 만큼 허전하다.
6/7
시계의 초침소리만 들릴 때가 있다. 허리가 굵직한 시간의 토막도 바늘 모양으로 쪼개어져 초침의 소리만큼 분해되는 때가 있다. 시간은 가루가 되어 빠르게 날아가 버렸다. '류시화'의 그대 안에 있어도 나는 네가 그립다.
다녀갔다. 내일은 밀린 편지들을 써야겠다. 지금 몹시 아프다.
밀린 편지들도 그가 등장하면 미루어 진다. 감기도 두통도 잠시 물러간다. 오직 그와의 약속만이 모든 면에서 우선한다. 그와의 만남은 늘 안타깝다. 따라서 집안 일들이 많이 축이난다. 가족들의 불만이 쌓이고 그 불만은 그녀에게 두통을 일으킨다. 가끔 갈등한다. 이 일이 계속 되어도 좋은 것인가 대답을 내리기 어려워 질 때 가슴이 헌다. 가끔은 단호히 그만 두리라고 마음을 먹어 본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결심을 할때면 그 일을 저해하는 일들이 발생한다. 이를테면 지금까지의 그녀 심정과는 전혀 반대의 그의 모습을 발견해 배신감에 오기로 확인해 보려 하다가 후회하며 훨씬 더 미안한 마음이 되어 다시 나가게 된다든지 하는 일들 말이다. 항상 우회하여 돌아다니는 말들은 이상한 위력으로 그녀의 가슴에 상처를 내기도 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아픔은 얼굴까지 터져나와 슬프게 하는 것이었다. 어느 날인가 유혹에 말려 그의 작업실로 달려가 따져보려 했다간 엉엉엉 울기도 했다. 가슴속에 있는 말들은 아무리 순수하고 진실해도 전해질 수 없는 것이니까. 그럴때에도 그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애처로운 표정의 그에게 그녀 또한 까닭을 말할 수 없었다. 그렇게 잠시 머물다 나왔다. 공원으로 갈 수 밖에 없었다. 무덤가에 앉았다. 무덤 속에서 뭘 보아 내려 했을까? 그는. 용신의 생활은 드러난 것처럼 단정하기만 했던 것일까? 소설 속에서의 용신은 농촌 계몽가로 나온다. 지금 이 자리에 함께 누워있는 학준은 소설 속의 박동혁과는 다른 인물이라고 한다. 그 시대에 그런 운동가는 용신 뿐이었단 말인가? 애인이었다는 이 사람은 용신이가 죽은 후에도 애틋한 사랑을 간직하고 있었단 말인가? 간직하고 있었다 한들 그게 또 무슨 대수였단 말인가? 세상에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하지 못한 경우가 얼마나 많은데. 이들의 사랑은 슬펐단 말인가 아름다웠단 말인가 그렇다면 바르게 살아가는 모범적인 삶 속에 양념처럼 드러나는 그들의 사랑은?
사랑은 희생된 것일 것이다. 윤리와 도덕같은 것을 정해 놓고 몇가지의 모범적인 삶의 유형을 만들어 놓고 맞추어간 사람들에게 희생당한 것이다. 그럼 누가 그들을 이렇게 만든 것일까? 작가이다. 심훈, 심훈선생이다. 왜 작가는 그들의 사랑에 앵글을 맞추지 않고 그들의 행적을 잡은 것일까? 당시의 시대적 요구 때문이었을까? 해가 서산으로 넘어간다. 이 시간에 늘 고향에 와 있는 기분이 든다. 그래서 한번도 이런 시간엔 해가 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 보지 않고 내려 가 본 적이 없다. 가슴 속에 슬픔을 담고 나와 무슨 쓸데없는 상상만을 하고 돌아가는 것일까?
유난히 긴 내용의 일기가 한편있다.
6/15 토
약속을 지키지 못한 일이 있어 전화를 해야 했다. 사무실로 다이얼을 넣었다. 내가 보내는 신호음만이 소리내어 울지 못한 울음이듯 크게 울리고 있을 뿐이라는 답변을 받아줄 주인이 없는 빈 공간으로부터 들었다. 기다려야 했다. 연락이 안 될 수도 있었다. 슬퍼졌다. 안된다고 다스려도 햇살을 향하여 맴도는 베란다 유리 그릇속 미나리 새순처럼 자꾸만 목을 늘이는 충동을 억제하지 못하고 또 다이얼을 눌렀다. 버튼을 누를 때마다 목 너머에선 울컥울컥 낯익은 비애가 솟았다. 음성이 들렸다. 소스라쳐 수화기를 놓았다. 의외로 조건이 좋을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자꾸 떠 올라 다시 용기를 끌어 내어 숫자를 넣었다. 오후에, 서로 연락하기로 하고 마무리 되었다. 나의 좌불안석은... ...
× × ×
오후는 어디 있단 말인가 오후는 어떤 모습이란 말인가. 매일 나를 스쳐 지나간 그 얼굴을 기억 할 수 없다. 쉬지 않고 작동하는 시계를 본다. 서두름도 없이 무표정으로 걸고 있다. 매달려 보아도 마음 써 줄리 없다는 것을 안다. 그렇지만 지금 나를 구제해 줄 유일한 방법은 저 무표정이 빨리 지나가 오후에 나를 데려다 놓는 것. ... ...때문에 목을 매고 있다.
슬픔은 도처에 몸을 숨겨 도사리고 있다가 한 순간이라도 긴장을 풀면 달려 든다. 육신안으로 들어와선 구석구석 실 핏줄 한 가닥에까지도 침투하여 감염시켜 놓는다. 평소에 꿈은 닿을 듯 유리벽 너머에 있다. 너무도 빤히 보여 그녀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유리벽은 빗장을 걸지도 않은 채로 방치되어 있다. 마음만 먹으면 넘어 설 수 있고 닿을 수도 있고 어쩌면 소유도 가능할 것 같은... ... 그러나 그를 향하여 발걸음을 옮겨 본 적은 아직 없다. 늘 유리벽 너머에 서성거리고 있을 뿐이다. 한 발 옮겨서면 주홍글씨의 돌팔매의 표적이 되는 행위나 아예 주거지를 벗어나 돌아 올 줄 모르는 영혼의 차이는 무엇이란 말인가.
유리벽을 넘어서는 일은 이승과 저승의 차이 만큼 아득하여 다시는 현실에 돌아올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이 그녀를 슬프게 한다. 슬프게 하는 조건들이 언제나 그녀를 구속한다. 갇혀 있을수록 탈옥을 기도하는 죄수들처럼 어제는 발을 뻗어 닿아보려 했다. 뿌리박혀 있는 발목의 운명을 위로받아 보려했다. 손을 내밀어 환상의 세계를 절반 쯤 만이라도 현실로 이끌어 치유받고 싶어했다. 꿈을 향한 꿈이 잖는 이 고통을... ... 세상을 둘러싸고 있는 두꺼운 껍질 하나를 깨고 나가려는 순간 역모는 탄로되어 무서운 형벌을 받아야 했다. 형벌이 가해질수록 그리움 머무는 곳은 더욱 순수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아직은 질기게 유혹하는 유리벽 너머의 의미보다 강하게 발목을 잡고 있는 것들... ... 그녀 또한 그것들을 향하여 강하게 폭행을 가했다. 자신의 상해가 더 컸다. 떨어져 있으면 유리벽의 거리만큼 떨어져 바라보면 그것들도 어질고 슬픈 표정이다. 자신보다 더 애절한 모습이다. 그리하여 문턱에서 번번히 돌아서고 만다. 일기의 마지막은 이렇다.
× × ×
어제는 일방적으로 만든 약속을 일방적으로 깨고 말았다. 불가항력이었다. 이쪽 저쪽 죄만 크다. 오후가 오면 어떻게 하나 현실에서 내가 겪은 고통들을 거두어 주리라는 확신이 있는가. 내 자신의 유리벽을 허물어 어느 한쪽 밖엔 볼 수 없도록 시선의 범위를 잘라 버릴 수 있단 말인가. 오후가 오고 있다. 무표정 무감각으로 오전의 시간들처럼 쓱 지나가 버리기를... ... 일면식도 없는 오후가 오늘은 무섭다.
6/16
어제는 오후가 없었다. 그냥 지나갔다. 애초부터 볼일이 없었던 것처럼 그냥 지나쳤다. 바로 곁을 지나칠 때의 서먹함, 안타까움, 슬픔과 허무가 똑같은 복면을 하고 한꺼번에 덮쳐 신음소리 한번 내보지 못하고 나는 피신해야 했다. 억울함일까? 이 허전함은.
그리고 오늘도 비가 온다. 비가 와서 다행이다.
비가 와서 다행이다. 빗 속에 파묻혀 소주를 알게 된 것이 그때 쯤 일 것이다. 그녀의 조건이 허락하지 않아 그를 불편하게 했을때, 혹은 그의 조건이 좋지 않아 연결될 수 없었을 때 갑자기 뚫려버리는 가슴의 커다란 구멍을 채우기 위해 소주를 택했던 것이다. 또 간혹 서로 물어보거나 정확치 않은 불신이 일때에도 확인할 의무와 자격을 갖추지 못했음으로 속으로만 태워야 했던 지독한 고통때문에... ... 어떤 경우에는 그의 작업실에서 외국에 있는 부인과 통화하는 내용을 듣기도 했다.
“달링”이라든지 “허니”라든지 사랑한다는 내용의 외래어를 들으며 부부의 일상대화에 흔히 있는 일임을 알면서도 가슴 한쪽으로부터 얼음살이 박히는 것을 느끼고 돌아 왔을때, 그보다도 같은 회원들이 자신처럼 그 작업실을 드나드는 것을 알아 냈을때, 소주와 마주 앉아야 했다. 묘하게도 술자리엔 항상 자상한 그녀의 남편이 동행하여 더욱 슬퍼지는 것이었다. 그런 경우 자신의 위치를 돌아 보기도 하고 그 사람이든 남편이든 상대의 입장이 되어 보기도 하며 생각을 정리해 나가다 보면 언제나 생각들은 간섭해야 할 아무런 자격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었다. 그때의 상실감은 그녀를 더욱 허무하게 만든다. 그러고도 생각이 더 깊이 들어가면 어떤 결과나 목표가 있는 것도 아니란 것을 알게 된다. 그럴땐 빨리 현실로 돌아가 자신의 위치에 정착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도 그런것을 알기에 묻거나 탓하거나 하는 일이 없는 것 같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처음처럼 공원 이전의 그림공부 이전의 타인처럼. 멀게 느껴지는 때도 있었으며 애써 그런 쪽으로 생각을 유도해 가기도 했었다. 그러나 성공해 본 적이 있었던가, 이런 내용의 일기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6/28
아침에 관청엘 갔다. 오늘은 안산에 부재라는 것을 알기에 느긋하게 내일만을 계획했다. 관청 볼일이 끝나고 g.g에서 쇼핑을 했다. 여러가지를 샀다.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일들을 보았다. 그리고 돌아와서는 두 시간 정도 잤다. 먼 여행에서 돌아 온듯 아늑했다. 의미의 부재가 평온을 가져다 주었다. 남편과 가족에게 의무를 다하게 해 준 일에 감사해야 하는가 기다려지는 마음을 뭉개버리고......
7/1
약속된 일들이 아무것도 없었다. 약속이 없는 날임으로 이것저것 챙겨 보았다.
7/3
내가 애쓰지 않아도 행운이 있는 날이다. 내 사무실에서 모임이 있었으니까. 구성원중에 핵이 되는 요소가 있어 내 안에선 비밀스레 축제가 인다. 그러나 너무 많은 장애에 애만 탔다. 가로수처럼 일정한 간격 유지해야 했다.
7/26
얼마전 불신으로 인하여 심경의 변화가 왔다. 오늘까지 지속되었다. 습관이 되어 버린 전화 다이얼 돌리기 의도적으로 피했다. 걸려오지 않으면 슬픔은 고체화되어 내 안에서 체증을 일으킬 것이지만 담고 견디기로 마음먹었다. 이 사치스런 고독이 오래 가길 바라며... ...
-중략-
전화가 왔다. 음성이 전해지는 순간 사소한 것이었던 불신은 커튼 자락 잡아 채이듯 확 걷혀버렸다. 솔직한 심정을 털어 놓았다. 여러번 전화를 했었다는 그의 말. ... ...점심을 같이 했다. 경망스러울 정도였을 것이다. 나의 엷은 즐거움.
수없이 다스리며 자신을 책망함에도 또다시 달려 나가는 그리움을 쫓아야 했을때의 변명은 늘 자신의 입장이 더 중요하다고 외치는 것이었다. 상대의 마음이 그의 부인 곁에 가 있던 어디에 머무르던 그건 상관 없는 일이 아닌가. 자신이 머무르고 싶은 곳 자신이 소유하고 싶은 것이 문제이다. 이런 생각은 정중한 그의 주변에 많은 여인들이 둘러 쌓여 있을 때 독점의식이 싹트면서 반항적인 태도로 일고 있다는 것으로 알고 있는바다. 의도적으로 드러나게 심술스런 행동을 했으면서도 그녀 또한 명확한 의사는 속에 깊이 감추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에도 공원에 오르게되면 영신과 심훈이 번갈아 가며 생각되어 지는 것이다. 사실 영신이 저기 저 자리에 누워 있게 된것은 그리고 무덤 앞에 고이 잠들다 라는 묘비를 앞에 세우고 저 자리에 보호받으며 누워있게 된 것도 오직 작가 심훈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작가의 관심이 없었다면 저 찬란하고 고귀하고 영특한 업적은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죽어간 많은 넋들 속에 묻혀 일찌기 세상에서 스러져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김학준 이라는 인물도 그 옆에 저렇듯 누워있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김학준의 묘비엔 ‘미망인 김근복. 아들 김천민, 천홍. 딸 군자, 휘자, 순호’라고 씌여 있다. 1975, 3,11에 죽었으며 1977, 9,27일 옮겨졌다고 적혀있다. 1935년에 용신의 죽음 40년 후에 사자의 유언으로 저 자리에 누운 것일까? 아니라면 미망인을 비롯한 자손들이 어떤 뜻으로 이리 옮겼단 말인가. 부인과의 사랑보다 영신을 더 사랑했다는 증거를 어디서 찾아낼 수 있었단 말인가. ‘상록수’는 얼마만큼의 신빙성을 갖는 것일까. 이런 생각속에서도 그녀는 간혹 죄의식을 느껴 소스라치곤 한다. 그 감정은 자신에 대한 것은 아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향하는 것이다. 자신은 신앞에 솔직하므로 위대한 신이 저해하지 않는 일임으로 항상 당당하며 자신이 위로 받을 수 있는 곳이 오히려 신의 앞에서일 뿐이라고 까지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아무도 없는 시간 그녀안의 신과 마주하면 그녀는 아주 은밀한 부분까지도 털어놓는다. 슬픔이라던지 기쁨이라던지 노여움과 분노로 온갖 화려한 감정들을 쏟아 놓지만 신은 사실 한번도 반응을 보인 적이 없다. 그럴때 신의 존재란 없는 것이지만 신이 없는 세상은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무지한 많은 사람들이 방황을 하게 될 것이다. 무지한 많은 사람들...... 그렇다 용신도 그에 속한다. 신에 의하여 삶의 가치를 교과서에 의존한 신에 의하여 지탱한 그래서 남보다 빠르게 이 세상을 떠난 가엾은 여인 중의 하나이다. 신은 알고 있다. 용신이 그런 삶을 택한 이유를. 그녀가 그런 삶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이유 또한. 하면 심훈의 사상도 알고 있을까? 심훈도 신의 지배로 인하여 용신의 모범되고 단정한 면만 보아내어야 했더란 말인가? 그녀는 생각한다. 자신이 왜 그런 것들을 부정적으로만 자꾸 해석하려 하는가를......
남편으로 부터의 압력의 정도가 점점 강해져 온다.
그녀의 방식대로 신을 향해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임으로 항상 구실은 확실하다. 구실이 확실한 만큼 그녀의 주장도 명징하다. 그래도 남편은 단속하는 강도가 점점 높아간다. 그가 인정하는 특별한 용무없이 집 밖에 나가서는 오랜 친구와의 커피 한잔도, 한 프로의 영화도 용납되지 않는다. 따라서 그와의 모든 만남들은 남편의 단속을 피하여 이루어지는 일들이다. 오기에 밀려 올려진 위험을 무릅쓰고 강행되어지는 것이다.
8/7
문 박사님과 김 화백이 다녀갔다. 교수님은 오시지 못했다. 건강이 안 좋으시다고 했다. 몹시 염려된다. 나는 계속 업무중에 있었다. 나의 일 속으로 그 분들이 들어 올 수 밖에 없었다. 두분은 내가 학생들을 지도하는 동안 창가에 놓인 둥근 원탁에서 책을 보거나 생각에 잠기며 차를 마셨다. 그리고 8시40분 경 내가 참여해야 하는 모임에 함께 갔다. 그리기가 궁금한 사람들이 모여 그림을 해부해 보는 모임이다. 내가 즐겨 참여하는 이 모임을 남편은 싫어한다. 그래서 좋은 조건을 갖춘 내 사무실에서 하지 못하고 다른 곳에서 모인다. 각자가 보름동안 연구해 온 작품이나 연구자료들을 기꺼이 수술대 위에 올려놓고 긴장된 마음으로 진단을 기다리는 것이다. 또 모두가 메스 하나씩을 챙겨든 시술의 멤버로 참여한다. 그곳엘 같이 간 것이다. 한 사람의 수술이 끝났다. 수술대에 오를 땐 온전한 모슴이었는데 내려와야 할 때 쯤엔 전신이 찢겨 너덜너덜 해 져 더욱 혼수상태가 되어 들려 나가게 만드는 것이 우리들의 수술방법이다. 무려 한시간에 걸친 참혹한 집행은 10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이 시간 이후부터 나의 생각은 오직 한 곳으로만 집중되게 되어있다. 맞추어 놓은 알람시계 작동하듯 이루어지는 현상이다. 그 때부터 내 표정위에는 초조 긴장 불안이 나타난다고들 한다. 그래서 그 시간이 되면 어디에서든 서둘러 돌아와야 한다. 모두들 그런걸 이해하고 탓하지 아니한다. 내가 돌아오게 됨에 따라 같이 동행한 분들도 돌아왔다. 그 모임은 시간이 흐를 수록 더욱 진지해져 새벽까지 이어질 것이다.
둥근 창가에 놓인 둥근 탁자 위에서도 제한된 시간이 있다. 11시이다. 11시가 넘으면 이 자리에서도 내 표정위엔 불안의 그림자가 걷다가 뛰다가 한다고들 한다. 그걸 발견하는 순간 나를 아는 모든 이들은 원격으로 조정되는듯 자동으로 일어선다. 늦어서 죄송하다는 말을 용서라도 비는듯 아프게 남기고들 떠난다. 그렇게 사람들을 보내고 나면 나는 늘 슬퍼진다. 이렇게 하여 나는 무엇이 보호되어지는 것일까? 이 세상에 나를 해칠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내가 애타게 그리워 하는 사람마저도 그가 나를 어쩌는 것이 아니라 내가 부추기고 졸라대는 것인데. 나는 왜 제한된 시간 제한된 행동의 철조망 안에서 갇혀 많은 가까운 사람들을 다치게 하는가. 내 꿈을 가두어 두어야 하는가. 무엇이 단정해 지는가. 요조 숙녀가 되어지는 것인가? 남편의 위력은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을 한다.
× × ×
그 위대한 사람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밤 11시10분 나를 찾아왔던 사람들이 돌아간뒤 20분이 지난 시간이다. 모임이 있어 늦을 것 같다는 내용, 순간 떠나던 사람들의 표정에서 읽었던 아쉬움 만큼의 허전함이 마음속을 스쳐갔다. 작업을 해볼까 생각했지만 이미 온 몸을 덮쳐버린 피로가 그냥 집으로 향하게 했다. 씻고 누웠다. 현관문을 스스로 들어 올 수 있도록 처리해 놓고 곧바로 잠을 청했다. 그는 적어도 2시는 넘어야 들어올 것이었다. 전엔 그렇게 늦은 귀가에 이의를 제기하기도 했었다. 남편이 그런 점을 번거로워 한적도 있었다. 그러던 것이 요즘은 거꾸로 그가 온통 나의 시간들을 체크한다. 숨통이 막힐 것 같다고 투덜 거리며 세월이 간다. 투덜거린다는 표현만으로 다소 즐거움이 담긴 뜻으로 전달될 수도 있겠으나 이미 그점은 벗어난지 오래이다. 경계나 방어가 계속되는 긴장속의 우리일상. 요즘은 자주 덜컹거린다.
한참을 자다 깨어 시계를 보았다. 새벽 3시를 넘어서고 있다. 잠이 깨이는 것도 아니지만 그는 세시, 네시..., 일곱시에 들어와도 아무런 문제가 없고 나는 저녁 일곱시만 넘으면 반드시 귀가 해야하는 까닭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잠을 깨지 않으려 애썼다. 생각이 꼬리를 물고 계속되는 가운데 키를 넣는 금속음이 귀속을 파고 들었다. 그 소리는 미온적으로 붙어 떨어지지 않던 잠을 신속하게 쫓아 버렸다. 그가 왔다. 새벽 5시. 누운채로 바라봤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채 돌아 누워 다시 눈을 감았다. 그도 내 눈치를 보는 것일까 예전같으면 사람이 와도 본체도 안하느냐고 말을 붙여 왔을 터인데
“화났어?”하고 장난을 걸며 다가왔을 터인데 아무말도 없이 욕실로 갔다. 씻고 와 이불을 들춘다.
“당신 침실에 가서 푹 자지 그래요?”하고 말했다. 출근 전 몹시 피곤해 보이던 것이 생각나서 무심코 한 말이다. 왜 그러느냐고 물었다.
“그냥”
하고 대답했다. 항의조가 섞인 음성으로
“전화했잖아”
“전화만 하면 5시건 7시건 그 다음날이건 편할 수 있는 당신은 참 좋겠어......” 낮에 내 스스로 남편을 의식하여 어려운 시간을 보낸것에 대한 불만이 배어 나도 모르게 튀어 나온 말이다. 그 다음은 너무도 당연하지 않은가. 그의 침상으로 갔고 무겁고 힘든 시간들이 천천히 지나갔다. 더이상 잠을 이룰 수도 없었다. 내가 그를 부담스러워 하는 만큼 그이도 내가 힘들고 어려워 한다는 것이 느껴지는데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8/11
내 사무실에서 예의 그 모임이 있었다. 친목을 도모하기 위한 모임이 아니므로 토의가 시작되면 아무리 길어져도 준비해 온 모든 사람들의 작품들이 끝날때까지는 마칠 수 없는 것이 그 모임의 특색이며 또한 나같은 사람의 경우에 있어서는 문제이다. 11시가 넘어서 회원들이 걱정했지만 되도록 편한 마음에서 마칠 수 있도록 배려를 했다. 남편이 의식되어 불안하지 않은 바는 아니었지만 어쩌랴 그냥 몸으로 때우리라 마음먹었다. 진행중에 남편이 도착했다. 마음으로는 회원들이 있는 동안만은 내색을 하지 말아 주길 바랬지만 그도 속마음을 감추는 재주가 없어 언제나 표정위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오늘도 표정 속에 담고 있는 노기가 드러나 회원들이 서둘러 돌아가고 말았다. 빈 공간에 둘만이 남아 있다. 잠시 냉기가 돌았다. 각오 한 바 대로 내가 먼저 공세를 시작했다.
“뭐가 잘못이야, 뭐가 불만이냐구. 저 사람들은 놀며 흥청거리는 모임도 아니고 공부하는 모임을 장소라도 가지고 있는 내가 좀 베풀면 어때서 그렇게도 배가 아픈거야? 심술이 나는 거야?”
“공부? 그놈의 공부는 밤을 새면서 꼭 해야 되는건가. 가정주부인 여자들이 말이야. 거기 있는 사내놈들도 똑같은 족속들이지......”
나도 정당성을 있는대로 내세웠고 그의 입장에서 쏟아내는 말들도 모두 타당했다. 잘잘못이 가려지지 않는 우리들의 문제는 어느 한 쪽의 양보없이는 언제나 끝내기 어렵다. 괴롭다.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다. 그를 찾아갔다. 찾아갔더니 눈물이 나왔다. 숨기지 못하고 울었다. 묻지도 않고 말하지도 않으며 그는 바라만 보았다. 신처럼 언제나 받아주기만 하는 그다. 그런 그의 표정에서 읽어낸 안타까움과 애처로움에 나는 위안이 된다. 또 울었다. 돌아오는 길 나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일이, 신 앞에 당당한 일이 오직 남편과 세속의 사람들에게 죄를 짓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즐겁지 못하다. 나는.
그녀와 그녀의 남편 사이에서 이런 다툼은 이제 일상에 해당된다. 그럴때면 그녀와 그녀의 남편 사이를 가르는 냉기는 기나긴 겨울의 한 계절과 맞먹는 기분이 들도록 오래 머문다. 결국엔 다시 화해를 하게 되지만 여성 폭력가처럼 몰아 부친 그녀 자신에게나 단정치 못한 난잡한 여성으로 몰아 세운 그녀의 남편이나 서로의 가슴 속 상처의 면적만이 넓어질 뿐이었다.
8/15
8. 15. 공휴일이다. 남편과 아이들과 지냈다. 침구가 밀어낼 정도로 잠을 잤다. 그리고 모두 힘을 모아 집안 청소를 했다. 가장 마음이 평온 할 수 있는 시간이다. 마음 저변에선 그리움이 발효되고 있다. 그러나 그리움을 찾아나선 시간에는 언제나 불안했었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지극히 당연하고 너무나 단정하다. 모든 것들이...... 집안일을 마치고는 쇼핑을 했다. 역시 세상에서 지당하고 가장 떳떳한 시간들이 새롭지도 지겹지도 않은 얼굴로 나와 동행하고 있었다. 천천히 천천히 외식을 하고 유원지에도 갔다. 소주 한병을 남편과 함께 마셨다. 이런 경우 술을 쳐 먹어도 귀여움을 받는 여자가 될 수 있다. 웃기는 것 같다. VTR로 영화를 보았다. 눅진눅진한 이런 시간에 긴장과 자극을 추구하는 내 정신적 욕구가 잠시 드러내지 않고 피신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와 를 보았다. 살아 있었다. 개울을 만난 물고기처럼 진실의 퇴화한 날개 지느러미를 놀려 유유히 물살을 가르고 있었다. 내 꿈인 주제들, 가능한 안정감을 오래 누리려 서둘러 수초 속에 몸을 숨겼다. 영화는 저격당하는 내 꿈의 안전한 피신처이다. 공휴일에 특히 오늘 같은 경우에......
그러므로 꿈을 꾸고 있는 한 꿈에서 깨어나는 한 그녀는 언제나 슬픔에 젖어 있다. 슬픔은 이제 그녀의 일부가 되어 버렸다. 가끔 공원으로 간다. 아직도 아카시아 나무아래 긴 벤취가 비어 있으면 그리로 가 앉는다. 그곳에 앉으면 여러가지 생각들이 습성이 되어 따라 붙는다. 요즈음 어느 한쪽도 평온 하지 않는 두 가지 일 중 하나를 정리해야 한다는 생각을 자꾸만 하게 된다.
사람들은 여전히 붐빈다. 몇 해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주변엔 서너개의 대형아파트 단지가 더 들어섰다. 전체적인 도시의 모습도 도서관, 공원, 공연장, 쇼핑센터등 문화시설을 갖추며 체계를 형성해 갔다. 따라서 용신이 누워있는 천곡공원도 잡초밭이 정리되고 정원수가 서고 산책로가 놓여지고 겉모습이 많이 변해 있다. 기념 할 만한 나무들, 즉 상록수 몇 그루와 상수리나무 아카시아 나무들은 보호수가 되어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교회의 모습도 옛모습 그대로이며 용신의 학당은 보완되어 이란 간판을 새로이 내걸고 어린이들의 유치원 교육과정을 교육하고 있다. 주변이 아파트 밀집지역이어서 제법 성황을 이루는 듯하다. 이곳의 교회나 유아원은 용신의 후배들이 맡아 운영한다고 들었다. 이 지역을 공원화하는 문제에 있어 재산상의 문제로 관청과 많은 트러블이 있었다고도 했다. 이런건 그녀가 애써 조사하여 얻어낸 자료들은 물론 아니다. 그저 이 지역에 먼저 와 터잡고 지내다 보니 이 문제 말고도 처음부터 들리는 소문들을 알게 됨으로 얻어진 것일 뿐이다. 여러가지 변화에 있어서도 공원은 사라지지 않았고 나무도 무덤도 그대로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산책은 이어질 수 있었다. 이 지역이 신도시로 개발 되기 전에 용신은 쓸쓸했을 것이다. 소설을 대할 때에만 기억하는 사람들이 일부러 찾아 줄 리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다녀간다. 그곳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행사들이 행해지기도 한다. 문학행사, 문화행사, 학술 세미나 등이 간간히 이루어 지는 것이다. 개발로 인해 의미없이 파 헤쳐 졌을 이 장소와 용신이란 여성이 이 세상에 어떻게 왔다 갔는지 아무도 알 필요를 느끼지 못할 일을 현대의 시대까지 옮겨와 새로운 모습으로 새로이 태어나게 하는 일은 작가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 측면에서 심훈의 위력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 아닐 수 없음을 실감하게 된다. 한편 이곳에서 아주 사라져 버린 것들도 있다. 몇년전엔 용신의 무덤으로 가는 오솔길 양 옆엔 봄부터 가을까지 소박한 한국의 꽃들이 피어 있었다. 지금은 반듯한 아스팔트 길 옆에 융단처럼 좍 깔린 잔디뿐이다. 단정하긴 하지만 오솔길에 의한 정감과 우리의 정서가 사라진 것은 몹시 아쉬운 일이다. 이런 흐름에 따라 그녀 자신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음을 인식한다. 전의 전업주부에서 이젠 사회인이 되어 있다는 것. 보다 많은 사람과 교류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동경해 왔던 신도시의 가능성으로 삶의 한쪽 편에 자신만의 새로운 그림을 그려 왔다는 것이다. 그 그림의 색조는 언제나 아름답다. 그러나 한편으론 늘 외로움이 드리워져 있다는 것은 예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경험이지만......
이젠 남편과의 문제들에 관하여 마음먹었던 일을 정리해야 한다. 분명 신도시로 이사를 오자고 결정했던 때 부터 발상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정원 제한의 엘리베이터에서 밀려 났을때처럼 꽉 짜여진 도시에선 언제나 밀려나 자신의 영역을 확보하지 못한채 신도시에서 꿈을 펴자고 마음 먹었던 때 부터가 조짐의 시작이었다. 삶의 가치를 자유라고 정했을때 그때부터 였다. 도덕과 상식과 종교적 윤리와 법률 같은 것들은 이상을 구속하기 위하여 심술스런 자들에 의하여 만들어진 장치적 의미일 뿐이며 그것을 벗어날때 진정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던 때 부터이다. 그러면서 초조와 불안과 긴장 같은 것 또한 슬픔을 실제의 체험으로 경험하게 된 것이다. 자신 또한 그런 것들에 의한 고통을 겪는 만큼 주변의 사람들에게도 같은 비중의 고통을 겪게 했던 것이다. 늘 숨통이 막히는 것 같고 놓아달라고 애걸하는 문제도 사실 상대가 놓아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놓여나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으며 놓여나리라 생각하며 여러번 결심을 하기에까지 이르기도 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번번히 용기가 공범자가 되기를 거부했다. 그리고 또 마지막 단계의 유리벽 앞에 이르면 그 곳에 어김없이 가까운 사람들의 얼굴이 어리어 있는 것이다. 특히 남편의 표정 깊숙히 자신의 것보다 더 큰 외로움이 유리벽에 나타나 보여지는 것이다. 그들의 불행은 모두 그녀의 꿈과 이상이 주범이라는 것이 전파처럼 감지 되는 것이다.
그녀의 꿈이 쉴 수 있는 곳은 영화나 소설속의 주제를 만날 때나 그녀가 스스로 그리고 있는 그름의 주제, 모시메리의 사나이로 부터이다. 그를 만나러 나갈때에는 알 속에서 부화하는 새의 심정이 된다. 종령기를 마친 곤충들이 날개를 단 성충이 된 것 같은 무한한 자유를 느낀다. 항상 불안과 위험을 동반하는 데도......
계몽가 최용신, 그의 밝은 면만을 보아낸 심훈의 정신이 맑게 느껴진다.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고 늘 불만인 자의 마음엔 평온이 깃들리 없기 때문이다. 마음이 평온하지 못한 상태에선 세상의 일들이 긍정적으로 바라 볼 수 없다는 것을 알아냈기 때문에 비로소 그가 바로 보이는 것이다.
몇일전 건강문제로 가족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의 부인이 와 있다. 자주 병원에 다니는 것을 지켜 보아 왔다. 그러나 그 문제는 그를 알고난 이후 그녀가 겪어야 했던 온갖 고통에는 미치치 못하는 것이어서 마음속에 두고 깊이 생각해 보거나 걱정 해 본 일이 없었다. 그의 부인이 그의 곁에 머무는 동안엔 연락도 방문도 불가능했다. 부인이 오기 전, 그녀를 불렀었다. 그의 표정에서 결별을 읽었었다. 그 순간 그를 만나지 못하고는 더이상 숨을 쉴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일었다. 아무도 없는 그의 작업실에서 였다. 숨이 멎을 것 같아 호흡 곤란을 일으키는 그녀를 그는 감싸 안았다. 그가 그녀를 요구했다. 이미 그런 일은 아무런 의미도 갖고 있지 못했다. 얼마나 확인하고 싶었던 일이 었는가. 그녀는 몸으로 거부했다. 그가 말했다. 한번 뿐이라고. 다시는 기회가 없을거라고...... 그는 애처롭게 어린아이가 된듯 보채고 있었다. 많은 말을 했다. 모든 궁금증이 해소됐다. 충분했다. 그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일고 보상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미 모든 것이 그에게로 갔다. 자신에게 남아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느꼈다. 그순간 그의 요구를 허락하는 것은 너무도 쉬운 일이었다.
“왜 안되는거지?”
그의 음성과 표정, 그에게서 저 외로움이 사라질 수 있다면 어디 그것이 문제이겠는가. 슬픔은 그 순간에도 서로의 가슴에 들어 앉아 떨어지지 않으려 용을 쓰고 있었다. 눈물을 담은 그의 눈빛이 강한 위력으로 또 한번 요구해 온다. ‘왜 안되는걸까?’자신과의 싸움이 시작됐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너무 쉬워 의미를 갖추지 못한 것들이 오히려 자신을 지켜내려고 기를 쓰는 애처로움을 보았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강간을 당하는 것처럼 대항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사정을 했다. 그러면서도 왜 그래야 하는가를 자신을 향하여 수없이 물었다.
‘이것 말고 더한 것을 가져 가세요. 이 엄청난 슬픔을요’
너무 쉬운것은 싫었다. 이상하게 죽어도 싫었다. 그것 뿐이었다. 시간이 흘렀다. 잠시 두 사람의 흐느낌 소리가 몇번 들렸을 뿐이다.
그가 말했다.
“숙아! 잘 했다.”
“......”
눈물을 펑펑 쏟으며 서러워했던 감정도 단호한 불가능 앞에선 구겨져 캔통속으로 스스로 들어가 웅크리는 것이다. 그 또한 신비로운 체험의 일종이다. 모든 일들이 오히려 정돈되어 차분하게 진행된다. 그녀 안에서 끓어 올라 분출하여 형체를 알 수 없던 슬픔도 차분히 고체가 되어 간다. 응고하여 덩어리가 되어 이제 깊은 밑바닥에 가라앉아 밖으로 나오는 일은 없을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의 부인은 그녀의 남편처럼 엄청난 힘을 발휘하였다. 그는 부인과 함께 먼나라 자신의 집으로 떠났다. ‘숙아! 잘 했다.’그 말의 의미가 살아 오래오래 머물러 있다.
가슴에 구름속에 가리워진 햇살 같은 비밀을 하나 살며시 들여 놓으며. 이 기분, 마른 쑥대궁 같은......
그가 떠난지도 벌써 여러 달이다. 언제나 의미의 부재는 그녀를 평온하게 했었다. 그녀의 남편은 요즘 절도있는 그녀의 생활에 흡족해 한다. 자주 공원엘 나와 주기도 한다. 비가 억수 같이 내리는 이젠 상록수라는 지명을 갖게 된 옛 천곡리의 천곡 공원 계단으로 폭포를 이루는 물줄기를 지켜본다. 그녀의 가슴속 밑바닥에 깔려 있는 비밀들이 색채를 발한다. 따뜻하다. 그녀의 남편이 집으로 가기를 권한다. 화들짝 놀라 그의 의사를 이의없이 받아들인다. 찬 바람처럼 빠르게 머릿속으로 생각하나가 파고든다.
‘이곳엔 이제 다시 오지 않으리라’
“여보 이제 여기 올 필요가 없겠어. 최용신이가 무슨 대수야 그 시대엔 최용신 말고도 얼마든지 더 큰 일을 한 사람들이 많다구, 용신이를 역사의 인물로 만든 사람 이 지역을 명소로 만든 사람은 바로 심훈이야. 심훈이 아니었다면 그 누구도 최용신이나 이 장소에 관심을 갖지 않았을걸? 다음엔 날 잡아서 심훈의 생가나 묘지에 한번 가보자.”
“이사를 가야겠군. 한 5,6년 찾아 다니려면 여기선 곤란하지......”
이사? 이사를 갈 수 있을까? 내 고향으로......
참으로 오랜만에 그들의 대화속에 바람이 끼어들지 못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