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꼭 숨어있던 삶의 명제를 찾다

고대농협에 근무하고 있는 김응숙 여성복지과장을 만났을 때 내가 다시 찾은 것은 ‘희망’이었다. ‘사람이 희망이다’라는 말. 그동안 어디에 숨어 있었을까? 삶의 명제와도 같은 그 말은 어느새 머리카락조차 보이지 않게 꼭꼭 숨어버렸었다. 이미 ‘희망’이란 단 두 글자를 사람에게서 읽어낼 수 없게 된 지는 오래되었다. 김 과장과 마주하고 있는 동안 그 말은 서서히 의식의 표면으로 걸어나와 손짓을 했고 수를 놓듯 한 땀 한 땀 마음에 돋을새김되었다.

“다 놓고 갈 거예요. ‘다른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준다’, 이것이 저의 좌우명이거든요. 사후신체기증도 이미 해놓은 상태예요. 그 동안 제가 해낸 일들은 모두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가능했어요. 저 혼자 힘만으로는 불가능했던 일들이죠. 그렇게 받아온 많은 사랑을 열심히 베풀면서 살 거예요.”

김과장을 만나러 갔을 때, 그녀는 고대농협 앞의 거친 공터에 나무를 심느라 정신이 없었다. 늘봄가든공원(고대면 진관리 2구) 윤필희 사장이 그 동안 가꿔온 단풍나무와 목련 등의 묘목을 선뜻 내주었고 김남진 고대면 예비군중대장이 몇몇의 장병들과 함께 일손을 보태고 있었다. 차림새가 엉망이라며 풀풀 먼지를 터는 그녀. 새까만 구두에 뽀얗게 내려앉은 흙먼지가 왜 그렇게 곱게 보였던지…….

하느님의 각본대로 파랑새가 되어

김과장은 지난 2월5일 농협중앙회에서 해마다 주최하는 여성복지대상 시상식에서 전국의 일선에서 노력한 15명의 여성복지담당자와 함께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또한 함께 근무하는 동료들의 추천으로 지난 3월30일 특별승진대상자로 선정되었다. 1984년에 고대농협에 입사한 김과장은 도시농협 여성단체와 자매결연을 통한 고구마캐기 사업·밤줍기 사업·꽈리꼬추따기 등 다양한 농촌형 프로그램 기획, 여성조합원 교육, 어린이 충·효 한문교실 운영, 도·농어린이 교류사업, 고대농협 여성풍물단 조직 등 일일이 꼽기에도 힘들 정도로 많은 일을 해왔고 앞으로도 여러 가지 큰 사건(?)들을 터뜨릴 계획에 있다.

“하느님이 저를 통해 많은 일을 하고 싶으신가 봐요. 그토록 많은 일을 하면서도 지치지 않는 이유요? 글쎄요……사랑이겠죠. 저는 하느님의 내려주신 각본대로 살고 있을 뿐이에요.”

느티나무가 좋아 우연히 성당으로 발길이 끌렸다는 김과장은 1999년 세례를 받고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어쩌면 그 느티나무는 하느님의 명을 받들라는 하늘의 계시였을까? 김과장은 그 후로 더 열정적으로 마을 주민들에게 사랑과 희망을 심기 시작했다. 경로잔치 풍물공연, 무인고 분묘 벌초작업, 독거노인 돌보기사업, 소년소녀 가장돕기 및 복지원 봉사활동 등 김과장의 손길은 느티나무의 무성한 잎들처럼 마을의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어떻게 그토록 많은 일들을 해낼 수 있느냐고 묻자 김과장은 하하하,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거짓 없는 그 웃음의 여운 뒤로 파랑새의 순한 활갯짓이 일렁이는 듯했다. 사람들에게 사랑과 희망을 물어다준다는…….

“저는 축복 받은 사람이에요. 무슨 일을 벌여놓으면 도움을 주시겠다는 분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나거든요. 고대면 새마을지도자 협의회 최창길 회장님, 농협충남지역본부 홍민영 과장님, 농가주부모임 박영인 회장님, 심준택 조합장님을 비롯한 동료들, 그리고 더 많은 사랑을 베풀 수 있도록 신앙의 길을 열어주신 신부님들과 수녀님들……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아요. 제가 참 많은 빚을 졌죠! 살아있는 동안 열심히 갚아나가야죠. 아니, 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갚아야 할 빚들입니다.”

보이지 않는 투명한 끈의 힘

나무를 심고 있는 김과장에게 마을 주민들은 봄꽃처럼 화사하게 웃으며 뭐 도와줄 것 없어요? 하고 안부를 묻는다. 그리곤 김과장이 뭐가 좀 필요하다고 속내를 털어놓으면 금새 휑하니 달려가 그녀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었다. 김과장과 마을 주민들을 하나로 묶고 있는 투명한 끈을 엿볼 수 있었다. 그 보이지 않는 끈이 어둡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빛과 관심이 되어 티끌 만한 사랑을 고대면의 드넓은 공설운동장처럼 크게 키워내는 것이었다. 친구도 많고 동료도 많은 그녀. 어떤 일이든 벌여놓기만 하면 그것이 꿈이 되고, 사랑이 되고, 희망이 되는 그녀. 그래서 살아 있다는 게 행복이라는 그녀. 자신이 한 일은 하나도 없다고 한사코 손사래를 치지만 그녀는 축복을 스스로 지어낼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지어낸 햅쌀밥 같은 축복을 한 숟가락씩 퍼내 마을 주민들에게 나눠줄 줄 아는 사람이었다.

일어나 인간관계에 있어서 그녀에게 돌아오는 축복의 비결은 무한책임주의에 가까운 끝없는 열과 성의, 그리고 한결같은 상호이익의 추구다. 그래서 그녀는 누구의 칭찬에도 인색하지 않다.

“제 인생에 있어서 가장 탁월한 선택은 김기동이라는 사람과 결혼한 거예요. 밤 늦도록 야근이 계속되는 저의 사회생활을 뒷받침해주는 든든한 버팀목이죠. 가슴이 참 넓은 남자예요. 그리고 우리 큰아들 대헌이와 막내 진호에게도 감사해요. 애들한테 신경을 많이 못 써주는데도 다음 세상에서도 저를 엄마로 만나고 싶대요.”

김 과장에게 막내 진호는 하느님이 내려주신 특별한 선물이다. 온라인 업무가 처음 도입되던 해에 그녀는 막내를 배속에 품고 새벽까지 야근을 했었다. 사내에서 온라인 업무를 처리할 수 있는 사람이 그녀 한 명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것이 병을 만들어 막내 진호를 아홉달만에 조산하고 말았다. 그녀와 진호의 생명을 함께 앗아갈 수 있는 사건이었지만 3㎏도 채 안 되는 막내가 인큐베이터 속에서 조금씩 자라나는 모습을 보며 그녀는 그때의 시련을 딛고 일어섰다. 언젠가 지친 그녀의 발걸음을 잡아끌었던 성당의 짙푸른 느티나무가 그녀에게 더 큰 힘과 열정을 주었듯이.

슬픔은 힘이 되고, 힘은 소망이 되고

아픔을 간직한 사람들과 함께 하지 못하는 것이 항상 밝게 보이는 그녀에겐 깊은 슬픔이 된다. 그러나 그 슬픔은 슬픔으로만 머물지 않는다. 슬픔이 깊을수록 그에 버금가는 힘을 지니게 된다. 두레박으로 우물의 물을 긷듯이 자기의 내부에서 길어 올린 그 힘이 그녀로 하여금 어두운 곳을 외면하지 않게 만든다. 마음의 심연에 터를 이루고 있는 그 희망적인 힘이 언젠간 복지관을 세워 노인들을 모시고 싶다는 그녀의 소망을 이루게 할 것이다. 그녀는 복지관을 세우기 위해 금전적인 저축뿐만 아니라 사람 저축도 하고 있다. 무엇이든지 나누지 않고는 못 견디는 그녀의 소망 또한 자신이 아닌 타인을 챙기기 위함인 것이다.

벼랑 밑의 아찔한 공간을 품고

그녀의 걸음걸이는 의연하고 다부지다. 어투 또한 그녀의 인상에 맞게 빠르고 경쾌하다. 그러나 그녀의 그런 밝음 뒤엔 몇몇 사람만이 아는 죽음이 몸을 숨기고 있다. 하나밖에 없는 신장, 담석증으로 떼어낸 쓸개, 당뇨병과 고혈압……아니다. 이런 것은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죽음을 너무 가까이 두고 사는 그녀에겐 오늘의 하루, 지금의 한 시간이 절박한 희망이 되고 강렬한 힘이 될 터였다. 절벽의 끝까지 걸어가 본 사람만이 벼랑 밑의 아찔한 공간을 품을 수 있지 않겠는가. 그녀가 오늘 거친 공터에 심어놓은 묘목이 모시천 같은 봄볕을 받아 조만간 푸른 잎으로 하늘을 가득 덮을 것처럼, 그렇게 그녀는 매 순간 불모의 황야에 맨 처음 움을 틔우는 희망이 될 것이다. 그 희망이 퍼지고 퍼져 푸른 들판을 이룰 것이다. 키만큼 자란 풀들이 바람에 따라 넘실거리며 쓰러졌다가는 다시 일어서는…….

이희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