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적, 그리고 뜨거운 화음

굵은 빗줄기가 우두두 쏟아졌던 지난 16일 밤늦게 호서고등학교를 찾았다. 스탠드를 비추고 있는 가로등이 외롭게 어둠을 사르고 있을 뿐 드넓은 운동장은 인적없이 고요하기만 했다. 그리고 어둠을 거부하고 있는 또 하나의 불빛. 바로 호서고등학교의 남자기숙사 계고관(稽古館)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이었다. 계고관(稽古館). 말 그대로 고서(古書)를 읽고 학문을 닦는 곳이란 뜻이다. 교육부의 지원으로 총 공사비 8억9천여만원을 들여 지난 98년 완공한 계고관은 18개의 침실과 컴퓨터실, 3개의 학습실, 식당, 각 층별로 샤워실 및 세면장, 화장실 등을 갖춘 현대식 3층 건물이다.

계고관의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 어둡고 긴 복도가 나타났다.

……정적……

아무런 소요도 없었다. 18개의 침실은 모두 불이 꺼져 있었고 학생들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도저히 76명의 학생들이 기거하고 있는 곳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복도의 저편 끝, 한폭의 불빛이 흘러나오는 학습관으로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문고리를 비틀고 문을 여는 순간, 공부하고 있는 학생들의 뜨거운 열기가 데일 듯 온몸으로 육박해왔다. 그곳엔 아주 미세한 소리들이 끝없이 교차하고 있었다. 스륵스륵, 사각사각…… 책장 넘기는 소리와 펜 굴러가는 소리, 그것은 학생들의 가슴속에 내장돼 있는 학구열이 발산해내는 뜨거운 화음이었다. 천장에 닿을 듯 높게 쌓여 있는 책들. 그 책들 속에 파묻힌 학생들은 꿈의 초석을 쌓으며 미래를 열고 있는 것이었다.

늦은 밤까지 용솟음치는 학구열

호서고등학교에는 남학생 기숙사인 계고관과 여학생 기숙사인 휘문관이 있다. 계고관에는 1학년 20명, 2학년 28명, 3학년 28명 등 총 76명의 남학생들이, 휘문관에는 1학년 18명, 2학년 19명, 3학년 20명 등 총 57명의 여학생들이 기거하고 있다. 이들 기숙사는, 각 학년별 대표와 전체학생대표로 이루어진 학생자치운영위와 학부모로 이루어진 ‘학습관 자치회’, 그리고 사감을 맡고 있는 교사 등 삼자간의 상호협력과 대화를 통해 자치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계고관은 황일수 교사와 손민석 교사가, 휘문관은 이서호 교사와 이민희 교사가 사감을 맡아 격일로 근무하고 있으며 학습을 포함한 기숙생들의 생활전반에 대해 지도·감독하고 있다. 오후 일곱 시부터 시작되는 학습시간은 열두 시까지 3교시로 나누어 진행되며 각 학습시간마다 20분 동안의 휴식시간이 부여된다. 또한 열두 시 이후 한시간 삼십분 동안의 심야자율학습 시간을 두어 기숙생들이 자율적으로 학습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했다.

밤 11시가 넘은 시간. 휴식시간이 주어지자 기숙생들의 수런거림이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잠깐 머리를 식히기 위해 밖으로 나간 학생들, 졸리움을 참지 못하고 팔베개를 만들어 책들이 널려있는 책상에 그대로 엎드려 단잠을 자는 학생들. 가요책을 펴놓고 기타를 치거나 그 옆에 둘러앉아서 노래를 부르는 학생들. 그러나 다시 학습시간이 시작되면 수런거림은 일시에 정적으로 바뀐다. 그 정적 속엔 채워도 채워도 모자란 학구열이 용솟음치고 있다. 책과 마주한 학생들은 곤두섬 그 자체이다. 그 순간 그들에겐 오로지 책이 있을 뿐이다. 그들이 쏟아내는 숨막히는 긴장과 집중은 결국 튼실한 활시위가 되어 그들의 꿈을 쏘아 올릴 것이다. 포근한 잠자리와 어머님이 차려주신 맛깔스런 밥상과 자잘한 편리함들을 제쳐놓고 그렇게 고생스런(?) 길을 택한 이유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기숙생들의 꿈과 목표

“제 목표는 대입이 아닙니다. 컴퓨터프로그래머가 되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가능하다면 벤처기업을 설립하고 싶어요. 연세대나 고려대에 도전할 생각입니다.”(1학년 대표 홍석만)

“경찰대학교에 지원할 생각입니다. 경찰청장이 되는 것이 꿈이거든요. 사회를 위해서, 국가를 위해서 일하고 싶습니다. 제 꿈을 이루기 위해선 공부를 게을리 할 수 없죠. 하루에 네댓 시간밖에 못 자는 것이 피곤하지만 그만큼 노력한 대가가 얻어지고 있습니다.”(2학년 대표 김정민)

“공부가 가장 객관적인 평가방법이기 때문이죠. 이곳에 있으면 통학시간을 최대한 단축할 수 있고 무엇보다도 교우들과의 경쟁과 정보공유를 통해 학습증진에 도움이 됩니다. 저는 서울대에 진학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때로는 입시위주의 교육체계를 만들어놓은 기성세대에 불만이 있기도 합니다만……나중에 제가 크면 바꿔야죠.”(3학년 대표 유영동)

“아직 무엇이 되겠다거나 어느 대학에 진학할 것인지는 결정하지 못했습니다. 계속 고민하고 있죠. 그게 무엇이든 공부를 통해서 이루고 싶습니다. 저는 호서인임과 동시에 계고관의 기숙생이라는 것이 떳떳하고 자랑스럽습니다. 공부를 잘하는 방법요? 예습과 복습을 철저히 하는 편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아시잖아요? 노력이라는 거.”(학생자치운영위 대표 3학년 박선업)

“노력한 사람만이 자신을 필요로 하는 자리를 찾아, 그 자리에서 최대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공군사관학교에 진학할 생각입니다. 더 크게는 우리나라의 우주항공학을 미국의 NASA와 같은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있도록 지도적인 역할을 하고 싶구요.”(학생회장 3학년 박민재)

‘고통과 걱정 속에서 사람이 살고,

안락 속에서 죽는다’

계고관과 휘문관의 2002년도 대학진학률은 무려 94%에 달한다. 수능성적이 탐탁치 않아 재수를 하는 학생들을 제외하면 전원이 대학에 진학한 셈이다. 그 중 강연무 학생이 서울대에, 이재휘 학생이 고려대에, 신정미 학생이 서울교대에 입학한 것을 비롯해 서울권의 대학진학률이 58%를 차지하고 있다. 명실상부한 호서고교의 요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일 사감으로 근무하고 있던 황일수 교사와 이서호 교사는 매 학습시간마다 학습관을 돌아보며 학생들을 지도하는 한편, 침실과 건물의 곳곳을 살펴보고 있었다. 사감을 맡고 있는 교사들의 세심한 배려를 엿볼 수 있었다. 격일로 근무하며 기숙사에 상주하는 그들의 열의와 희생이 기숙생들의 꿈을 키우는 자양분과 밑거름이 될 터였다. 기숙사운영부장을 맡고 있는 황교사와 잠깐 틈을 내어 찻잔을 마주하고 앉았다.

“고생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학생들과 학교를 위한 봉사죠. 그게 교사들이 해야할 일 아니겠습니까. 저희 계고관이 더욱 발전하기 위해선 연중무휴의 기숙사운영과 휴게실과 강의실 등의 복지시설 확충이 시급합니다. 또한 오랜 시간 공부할 수 있도록 학생들의 의자를 안락한 것으로 교체하는 것과 복도에 장판을 깔아 청결문제를 개선하는 것도 중요하구요. 앞으로 점차적으로 개선해서 호서인의 지성을 키우는 상아탑으로 자리매김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죠.”

취재를 끝낼 무렵 맹자의 한구절을 말하는 황교사의 한마디가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았다. 生於憂患, 而死於樂(생어우환, 이사어락). 고통과 걱정 속에서 사람이 살고, 안락 속에서 죽는다는 뜻이다. 오늘도 곤두선 지성으로 밤을 하얗게 세우고 있을 기숙생들의 그 쓰디쓴 고통이 언젠가는 그들 자신에게 잘 영근 열매로 돌아올 것을 의심치 않는다.

이희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