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하고 깨끗한 내집 갖는 게 소원

오십줄 넘어 결혼식 올린 고건만·지희순씨 부부

순성면 갈산리에 사는 지희순(53세)씨는 얼마전 꿈에 그리던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고 결혼식을 올린 새색시다. 적십자당진읍봉사회가 마련해준 동거부부 합동결혼식 덕분에 남편 고건만(54세)씨와 함께 살기 시작한 지 꼭 20년만에 소원을 이룬 것이다.

결혼식날 너무 설레인 나머지 속옷입는 것도 잊어버리고 미용실에 갔었다는 지씨. 인생의 쓴맛이란 쓴맛은 다 맛보고 오십줄이 훌쩍 넘어 올리는 결혼식이었지만 그도 어쩔 수 없는 신부였던 것이다.

“10년만 일찍 했더라면...”

결혼식에 와준 동네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얼굴에 잔주름이 잡힌 신부를 보고는 안타까워 이렇게 말들했지만 남편 고씨로부터 처음으로 ‘예쁘다’는 말을 들은 지씨는 그것으로 대만족이었다고 한다.

더 바랄 것 없이 행복한 날이었지만 지씨는 어떻게 살았는지 모를 정도로 고생해온 과거가 주마등처럼 스쳐가 얼굴화장이 엉망이 될 정도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지씨는 지금도 과거얘기만 할라치면 닭똥같은 눈물을 뚝뚝 흘린다.

가난한 집안의 7남매중 둘째딸이었던 지씨는 보리밥조차 먹기 힘들어 열네살 때부터 남의 집 식모살이로 객지생활을 하다 한 남자를 만났다. 그러나 첫 남편은 딸 하나를 남겨두고 일찍 세상을 떠 지씨는 서른네살 때 지금의 남편을 만나게 됐다. 당시 서른다섯의 노총각이었던 남편 고씨는 땅 한평, 변변한 집 한채없이 남의 농사채를 빌어 어머니와 장애인인 형, 조카딸과 함께 살고 있었다.

총각에게 시집오면서 애를 데리고 올 수 없어 초등학교에 다니던 어린 딸을 친정에 맡기고 온 지씨는 그때부터 온갖 고생 다하며 살아야 했다. 시골에서 손바닥만한 남의 농사채 갖고는 생활이 안돼 조카와 함께 서울 봉제공장에서 시다로 일해 보기도 했고 자식없는 것을, 가난한 것을 비관해 폭음을 일삼던 남편과 더이상 살 수 없어 가출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씨의 가출은 1주일을 넘기지 못했다. 지씨가 집을 나간 후 남편 고씨는 연일 술만 마셔 폐인이 되다시피 했다. 보다 못한 조카딸이 지씨를 찾아와 빌면서 돌아와 달라고 애원했고 ‘그놈의 정이 뭔지’ 지씨는 남편곁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러나 아무것도 가진 것 없었던 이들에게 가난은 평생을 따라 다녔다. 어릴 때 친정에 맡겼던 딸이 어느새 장성해 결혼할 때에도 지씨는 빚을 내어 가까스로 이불 한 채 해줄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남편이 한보에서 일용직으로 일하게 되면서 형편이 좀 나아지나 했더니 그나마 부도가 나는 바람에 일자리를 잃어 지금은 1년에 3~4백만원 수입에 불과한 남의 논 열두마지기가 유일한 생계수단이다.

텃밭에 심었던 배추 1백포기를 팔아 어렵게 결혼식 하객들에게 대접할 음식을 장만할 수 있었던 새신부 지씨. 신혼여행 다녀오라며 이웃집에서 건네준 제주도 여행권조차 여비가 없어 돌려줘야 했지만 지씨는 자기 생애엔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았던 결혼식을 치르게 된 데에 ‘이제 더이상 무얼 바라겠냐’며 마냥 흡족해 한다. 결혼식을 마련해준 따뜻한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도 빼놓지 않는다.

남한테 준게 없어 바랄 것도 없다는 지씨에겐 그래도 버리고 싶지 않은 소박한 꿈이 하나 있다. 아담하고 깨끗한 내집 한채 갖는 것. 방 두개 딸린 남의 초가집을 지붕 개량하고 처마를 달아내 사는데 큰 지장은 없지만 내집 내땅이 아니기에 지씨는 늘 빚을 지고 있는 것처럼 마음이 편하지가 않다고 한다.

그리고 정 하나로 모진 세월을 함께 살아온 남편과 ‘가는 날’까지 건강하게 사는 것. 더이상 남에게 신세지지 않고 자신도 누군가에게 작은 것이나마 베풀어 줄 수 있게 되는 것이 지씨가 바라는 또 하나의 소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