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당
▲ 마당

2천만원 융자 ‘귀농’,

관상조류 길러 연간 3천5백만원 이상 수익

불행은 아무런 기별도 없이 삶을 침범한다. 마치 예고된 것처럼 아주 조용하고 민첩하게 삶의 한복판을 가른다. 어떤 지평을 향해 나아가던 삶은 침몰 당하고 삶의 가녀린 숨결 뒤로 남는 것은 아물지 않는 상처, 지워지지 않는 흉터일 뿐이다. 그러나 천형 같은 불행을 당했더라도, 그 불행이 남겨놓은 상처가 삶을 점거하더라도 다시금 불행의 사악함을 딛고 희망을 엮을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회복이나 복구, 진보에 대한 본능이 정체를 알 수 없는 힘을 우리의 내부로부터 샘솟게 하기 때문이다.

산업재해로 오른쪽 다리를...

인천제철소에서 근무하던 박종원(48세)씨는 지난 1996년 6월15일 산업재해로 오른쪽 다리를 잃었다. 절망과 막막함, 그리고 없어진 오른쪽 다리가 남겨놓은 고통스런 허전함만이 그에게 남았다. 그의 삶을 침범한 불행은 그 하나로 끝나지 않고 그의 가족에게로 번져갔다. 6개월 동안의 치료기간 동안 그의 아내 남상렬(47세)씨는 신경과와 정신과에 다녀야 했고 그의 어린 자식들도 희망을 잃었다.

“건강하고 가장 믿음직스럽던 우리집의 대들보인 제가 쓰러지고 나자 우리 가정은 엉망이 되었습니다. 다리가 아픈 것보다도 참을 수 없었던 것은 마음의 상처였습니다. 아내가 잠시 병상을 비운 사이 울기도 많이 울었죠. 불구라는 멍에, 그것이 저의 마음을 찢었습니다.”

희망을 품고 당진 구룡리로

6개월 후 의족을 달고 회사를 찾았으나 이미 그의 자리엔 다른 사람이 서 있었다. 회사에선 마음에 드는 자리가 있으면 얘기하라고 했지만 불구가 된 그가 일할 만한 자리는 없었다. 사직서를 제출한 그는 두 주먹으로 눈물을 닦아내며 절름발로 회사를 떠났다.

이듬해 1997년 9월 그는 가족을 데리고 처가가 있는 당진으로 내려와 관상조류를 기르기 시작했다. 그를 불구로 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그의 자신감을 좀먹어갔고 그의 아내 남씨도 인천생활이 지옥 같았기에 인천에선 더 이상 살 수 없었기 때문이다. IMF가 터진 ’97년 당시 뜬금없이 당진으로 내려와 2천만원의 귀농자금을 융자받아 뒷산에 조사를 짓고 관상조류를 기르는 그를 모두들 제정신이 아니라고 여겼다.

“새를 길러서 성공한다는 생각은 없었습니다. 아내의 정신적인 안정과 가정의 믿음을 찾는 것이 가장 우선이었죠. 악착같이 일하면 아픔을 잊었습니다. 다리가 아파도 참고 걸었던 것은 젊은 나이에 주저앉을 수 없었던 까닭입니다.”

장애 딛고 새처럼 제2의 비상

그의 가족들에게 당진이, 그리고 아름다운 깃털을 지닌 새들이 새로운 삶의 터전이었을까. 구룡리에 20여평의 조류사를 세워 관상조류 사육을 시작하면서 그는 가장으로서의 자신감을 회복했고 그의 아내 남씨도 신경약을 끊고 정신적 안정을 되찾았다. 그 누구로부터 관상조류 사육에 관한 기술을 배운 것이 아니었다. 그들 부부가 직접 책을 보며 처음으로 십자매 150쌍을 기르기 시작했고 경험으로 익힌 사양관리 기술로 문조, 잉꼬, 금화조, 왕관앵무, 모란앵무, 금계, 공작, 공작비둘기 등으로 점차 종을 넓혀나가는 한편 도시지역 친지들을 동원해 판매망을 확보해나갔다. 사육두수가 계속 늘어나 새로운 사육시설이 필요하게 되자 지난 1999년 농업기술센터로부터 관상조 사육시설 개선자금 1200만원을 지원받아 23평의 조립식 조사에 난방시설, 지하 환기시설 및 스트레스를 줄이는 종류별 칸막이를 설치해 사육환경을 최적의 상태로 만들기도 했다. 관상조류 사육이 인기를 타자 한때 수많은 업자들이 달려들어 대량사육을 시도했고 그 결과 새값이 떨어져 어려움에 직면했지만 그는 우직하게 새를 돌보고 길렀다. 단시일 내에 많은 수익을 올리려고 뛰어들었던 사람들이 대거 관상조류 사육을 포기할 때도 그는 꿋꿋이 자기의 자리를 지켰다. 느긋하게 인내를 갖고 열심히 일한 것, 그것이 그가 성공한 가장 주요한 이유였던 것이다. 현재는 연 3회 십자매, 문조, 잉꼬, 앵무새 등 11종을 생산, 도매상을 통한 대량판매와 전화주문판매를 통해 연간 3천5백만원 이상의 수익을 올리고 있다.

그에게 강한 힘을 주는 원동력

그의 곁엔 항상 그의 아내 남상렬씨가 있었다. 불구가 돼 절망의 나락에 빠졌을 때 그가 떠나가라고 애원했지만 남씨는 그의 병상을 지켰다. 가라는 사람의 옆에 있기는 얼마나 서럽고 어려운 일인가. 오죽했으면 부인에게 제발 가라고 애원한 그, 그리고 가라는 사람을 지킨 남씨. 남씨는 그에게 잃어버린 오른쪽 다리를 스스로 일으켜 세울 수 있는 힘을 주었던 것이다.

“남편이 불구가 돼 병원에 입원했던 동안 나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병원과 집을 수시로 오가면서 가정과 남편을 보살폈죠. 낙담과 절망, 막막함이 가득한 가슴으로 그 시절을 버텼습니다. 그러던 어느 순간 가슴에 쌓인 것들이 솟구쳐 올라와 신경쇠약에 걸렸죠. 내가 내 마음을 다스리지 못했던 겁니다. 지옥……그 말밖에 표현할 다른 말이 떠오르지 않는군요.”

남씨는 그의 아픈 가슴을 위로하지 않았다. 의도적으로 그의 아픔을 외면하고 피해버렸다. 당진으로 내려와 관상조류를 기르기 시작할 때도 남씨는 그가 모든 일을 하도록 내버려두었다. 다만, 그가 지쳐 도저히 다리를 움직일 수 없을 때 그 대신 못 다한 일들을 거들기만 했다. 그의 아픔에 동조하지 않기, 그 억척스러움이 남씨가 그에게 힘을 주는 원동력이었다.

“남편은 장애인이 됐지만 장애인으로 생각하지도, 그렇게 대하지도 않았습니다. 정상인과 다를 바 없이 가장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도록 강요했죠. 비지땀을 흘리며 아픈 다리를 움직이며 일하는 남편을 볼 때마다 가슴이 무너졌지만 남편이 스스로 일어나도록 내버려두었습니다. 남편의 아픔에 같이 말려들면 그 시절을 도저히 이겨낼 수 없었기 때문이죠.”

그는 오늘도 뒷산에 올라간다. 그냥 올라가는 아니다.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뒷산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 아름드리 소나무에 몸을 부딪친다. 운동도 하고 높은 곳에서 먼 곳을 바라보며 앞날을 설계하는 것이다.

살아간다는 것, 그것은 때로 슬프기도 한 일이지만 우리는 살아갈 수밖에 없다. 지나간 날 가슴을 찢고 간 상처가 있더라도 구름을 걷고 햇빛을 여는 바람처럼 우리에겐 다시금 아픔을 잊고 삶을 살고자 하는 희망과 본능이 용솟음치기 때문이다. 각자가 타인에게 견주어보는 자신보다 더 위대한 존재임을 우리들은 깨달아야 한다.

이희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