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창 팔팔뛰던 20대에 내가 좋아하던 노래가 있었다. 바로 회심곡이다. 교회를 다녔지만 회심곡을 들을 때마다 애절한 내용과 소리에 코끝이 아려오곤 했었다. 그 중에서 가끔 흥얼거리던 소절이 ‘잠든 날과 병든 날을 다 빼고 나면 단 40을 못 사는 인생’이라는 부분이다. 어찌 보면 짧은 인생을 위해 아등바등하지 말라는 뜻도 같고 어찌 보면 너무나 짧은 인생 최선을 다하라는 소리도 같았다.
인간의 수명이 길어진 지금은 한 50 쯤 살게 되려나 생각해 본다. 요즘 큰 사고가 없다면 80을 사는 것은 그다지 놀랄 일이 아니다. 오래 살아서 좋기는 하지만 스스로를 책임지고 경쟁사회에서 살아내야 하는 날들이 더 많아졌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런 면에서 나는 우리 아이들이 겪어내야 할 길고 긴 여정을 생각하면 안타까워질 때가 있다.
중학교 아들놈에게 공부 안 한다고 다그치다가도 이제 15살인 우리 아들이 80만 산다고 해도 앞으로 65년을 경쟁사회 속에서 ‘열심히’ 살아야만 한다는 생각에 불쌍해진다. 그 길고 긴 여정을 생각하면 초등학교 중학교 정도는 여유롭고 행복하게 놔둘 수는 없을까 생각해 본다.
요즘 읍·면단위 소규모 학교는 고사위기에 처해 있다. 시골 학교를 기피하고 면단위 학생은 읍으로, 읍단위 학생은 시로, 시단위 학생은 서울로 이동하기 때문이다. 이동의 이유는 아주 간단하고 분명하다. 좀 더 큰물에서 경쟁하며 ‘열심히’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아이들을 키우면서 가족이 저녁을 함께 먹어야 하기 때문에 학원에 보내지 않는다고 하면 편집증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나는 우리 아이들과 함께 할 시간이 너무나 조금 남았다는 것을 안다. 고등학생만 되면 같이 있고 싶어도 시간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가족이 함께 하는 시간을 통해 삶의 지혜와 세상을 보는 눈을 가르칠 의무가 부모에게 있기 때문에 나는 이 편집증을 고치지 못한다.
그리고 성인이 되면 우리 아이가 살아야 할 냉혹한 사회를 생각하면 지금부터 닦달할 수가 없다. 우리는 경쟁의 결과는 무엇이고, 행복한 추억과 따뜻한 가슴이 없다면 어떤 인생을 살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불나비가 불에 뛰어들 듯 경쟁사회를 향해 돌진한다.
자식을 잘 키우고 싶은 것은 모든 부모의 바람일 것이다. 그러나 무엇이 정말 아이들을 위하는 것인지, 어떻게 키우는 것이 열심히 사는 아이로 키우는 것인지 한 걸음만 숨을 고르고 생각해 보자. 그리고 들에서 산에서 얻은 지혜와 가슴으로 튼튼해진 아이들이 세상을 당당하게 헤쳐 가는 모습도 상상해 보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