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진동 소설가

더디 흘러갔던 지난 세월 속에는 아직껏 삶과 예술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동구 밖에서 마을을 지키던 느티나무가 보이지 않을 만큼 재빠른 세상. 그 와중에 세상은 새 세기로 바뀌었으나 사람들 관념은 아주 서서히 변화된다.

그런 이들이 컴퓨터 앞에 앉아 만든 서류는 기실 너무나 그럴싸하게 앞서가 빰대귀를 친다. 짐짓 사람들 사이에 서로가 다른 생각이 존재한다는 엄연한 사실에 눈 떠가면서도 분분한 말들은 흘러 넘쳐난다.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먼저 생을 살다간 이들의 모습에서 남아 있는 흔적과 혹은 산 사람들의 자취를 15회 연재해 들쳐본다.

- 편집자 주 -

소설가이며 시인에다 영화인이던 심훈이 죽은 때는 1936년 9월 16일이다. 1901년 9월 12일에 태어나 36세, 짧게 산 삶은 친구 최서해나 김유영, 방정환이나 김유정, 나도향, 이상, 이장희 등도 자유롭지 않다. 20~30년대 일제 강점기 속에서 움트던 한국문학사의 근대기는 암울했지만 그 속에 스며 있는 생생한 삶들은 지금에도 그저 구구절절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여기 그가 죽은 달에, 그를 애도하며 특집을 마련했던 잡지를 발굴, 사후 66년만에 세상에 알린다. 그 잡지는 바로 대중 월간 잡지이던 사해공론 1936년 10월호이다.

이 잡지는 1935년 5월에 창간해서 1939년 11월호까지 통권 55호로 폐간된 잡지인데 발행인은 김해진, 인쇄인은 김유관이며 사해공론사 발행이다. 이 잡지사에서는 ‘부인공론’이란 잡지도 함께 만들고 있었다. 국판 374쪽이나 되는 이 잡지의 앞부분은 18쪽까지 유실되어 아쉽지만 그런대로 잡지의 실체를 가늠해 볼 수 있어 천만 다행스럽기도 하다. 전쟁통에도 살아남았으니까.

이 10월호에는 임화의 수필 ‘남방 비행편’, 장편연재 ‘야화’(이주홍), 한인태의 단편 ‘무덤’, 양주동 번역의 ‘황금과 사랑’, 윤백남의 ‘기담’, 중편연재 ‘백장미’(함대훈), 북쪽으로 간 엄흥섭의 장편연재인 ‘구원초’, 특집으로 대학 ‘정문의 로맨스’(평론가 김환태 외 5명), 만문산조 가을신조(글 그림 최영수) 등이 실려 있어 지금의 대중 잡지와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인다.

심훈의 애도 특집은 110~ 115쪽. 6쪽을 할애하고 있다. 단장을 짚고 찍은 36살 어느 날의 전신 사진과 그의 약력, 그리고 그와 생전에 교류했던 이들이 쓴 조사 8꼭지가 이어진다. 3쪽을 할애한, 당시 내놓라하던 평론가 김문집이 대학병원 시체실에서 밤을 새우며(이태준도 함께) 써 내려간 “심훈 통야현장에서의 수기”가 죽은 이를 절절하게, 사무치게 그리워하는 한탄으로 쓰여 있다.

심훈은 이 잡지에 봄부터 9월호까지 펄벅의 “대지”를 번안해서 연재를 하고 있었던 것.(6월호에는 연재된 사실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편집후기에 H기자는 심훈의 죽음에 대해 “너무 뜻밖이라 꿈같은 비애가 개시전화로 왔다”며 하늘을 탄식하고 있다.

조사를 쓴 이들-서광제(카프 영화운동의 대표적 논객. 소설도 몇몇 발표), 최영수(1909~? 만화가. 도쿄 가와바다미술학교 졸업. 33년 동아일보사 입사,신동아에 근무하며 연작만화를 그림. 만화만평을 개척), 김안서(=김억. 평북 정주 출신의 시인. 최초의 역시집 좥해파리의 노래좦를 냄, 잡지 좥개벽좦에 ‘에스페란토’ 자습실을 연재하고 책으로 간행. 김소월의 스승이며 그를 민요시인으로 키웠음), 김태오(1903~76. 아동문학가. 26년 ‘아이생활’로 문필활동 시작. 27년에 한정동·신재환·정지용·윤극영·고장환 등과 실천적 동요단체인 조선동요연구협회를 창립해 아동예술운동을 전개), 이기영(호는 민촌. 충남 아산 출생, 잘 알려진 장편소설 “고향”(조선일보 1933~34년 연재)의 농민작가. *복자인(월북)), 김유영(1908~39. 경북 선산 출신. 보성고보 졸업. 29년 조선영화예술협회에서 영화수업을 받고 일본 교토에서 서광제와 영화 연수. 영화로 유랑(28년), 혼가(29년), 애련송(39년), 수선화(44년 유작)를 감독), 이태준(1904~74. 호는 상허. 강원도 철원 산. 1920년 시대일보에 단편 ‘오몽녀’ 발표. 33년에 박태원·이효석·정지용 등과 구인회 조직. 소설 ‘해방전후’로 해방문학상에 ‘도정’(지하련=임화의 내자)과 겨루다 제1회 수상작이 됨. 지은 책-소련기행, 무서록, 상허문학독본. *복자인), 엄흥섭(프로예맹의 일원. 소설가. 대표작 ‘동틀 무렵’을 북한에서 탈고. *복자인), 김문집(1909~? 평론가. 대구 출생. 일본 도쿄제국대 문과 중퇴. 36년 동아일보에 ‘전통과 기교문제’를 연재하며 문예활동 시작. 이후 동아일보에 화돈칼럼을 통해 신랄한 문예활동을 함. 저서- 일본어 작품집 ‘아리랑 고개’, 평론집 ‘비평문학’) 그 중에서 골라 이태준이 쓴 조사를 보면 이러하다. “훈군. 아직도 군은 서울 어디 있는 것만 같다. 전화가 올듯 한도 2층에나 은령 같은데 들리면 곧 만날 것 같구나. 그런데 정말 이것은 이제 불가능하단 말인가. 앓던 것을 보기나 했어도 덜 허무하겠다.”

(*) *복자(伏字 )-일제 강점기와 해방 공간에서 검열에 걸려 문장이 'OOOO', 'XXXX'식으로 지워진 것을 말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