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능 아까워한 선생님의 충고로 상경
고학으로 대학입학, 사업성공 후 사회환원활동
전쟁이 끝난지 5년이 지난 1958년, 까까머리 한 소년이 공부를 위해 일가친적 하나도 없는 낯선 서울로 향했다. 서울에서 부임한 선생님이 소년의 뛰어난 재능이 아까워 ‘너는 무조건 서울로 가라’는 말을 듣고 소년은 서울행 기차를 탔다.
소년은 어느덧 환갑을 넘은 나이가 되어 매년 출신학교인 합덕초등학교에 6백만원, 합덕중학교에 9백만원씩 장학금을 보내고 있다. 어렵게 공부하던 그 시절을 떠올리며 후배들에게 조금이라도 보탬이 됐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합덕이 고향인 표상기(63) 사장.
표 사장은 중학교 때 미술과목만 85~90점, 나머지 전과목은 100점을 맞을 정도로 머리가 좋아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게 됐다.
지금 합덕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큰 형 표응렬(73)씨와 택시사업을 하고 있는 작은 형 표기옥(67)씨 역시 머리가 좋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그랬듯이 가정형편이 어려워 학업을 포기해야만 했던 아픔이 커 막내인 표 사장만큼은 공부시켜야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우리 큰 형님이 군대를 갔을 때 저를 공부시키기 위해서는 서울로 보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그곳에서 서울에 사는 친구를 사귀었답니다. 정말 치밀하신 분이시죠.”
이로 인해 표 사장은 올라오자마자 큰 형 친구의 도움으로 그 집에서 3~4개월간 머물게 된다.
그후로 입주 가정교사를 하다 그게 여의치 않으면 그때 당시 마포의 인태식(당진출신) 전 국회의원이 ‘당진학사’라고 당진출신 학생들에게 거의 무료에 가까운 싼 가격으로 잠만 재워주는 곳이 있었는데 그곳을 왔다갔다 하면서 지냈다.
“고2 때부터는 입주 가정교사를 계속하게 됐죠. 고3이 되고 나서는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가정교사를 그만두고 공부만 했습니다. 제 평생 그렇게 열심히 공부한 적 없었어요.”
그렇게 그는 서울대 공대 원자력과에 입학하게 된다.
1965년 2월 졸업 후에는 원자력연구소에서 2년을 근무했다. 그후 관련업체인 화신산업에서 10여년 동안 근무하다 ‘상지상사(주)’라는 무역회사를 설립하게 된다.
이 회사는 외국에서 원자력발전소의 기자재, 연료, 우라늄 등을 수입해 공급하는 업체다.
표 사장은 사업 뿐 아니라 사회활동에도 적극적이다. 서서울청년회의소 회장 및 특우회장, 한국청년회의소 국제실장, 세종라이온스클럽 회장, 서울대 총동창회 이사, 서울대 공과대학 원자핵공학과 동창회장, 재경합덕중 총동창회장, 한국무역대리점협회장, 한국원자력산업회의 감사 등 다양한 사회활동을 했다.
이런 활동으로 인해 무역의날 산업포장, 무궁화사자대상, 공과대학 발전공로상(서울대) 등을 수상하는 영광을 안기도 했다.
표 사장은 당진시대신문에 대해 “어떤 현안이든지 한쪽의 목소리만 크게 부각시키지 말고 똑같이 찬성, 반대입장을 실어 주민들이 스스로 판단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신문이 되어달라”며 “독자입장에서 늘 지켜보겠다”는 말도 빠뜨리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