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석문중학교 신양웅 교장 "

잠자고 있는 당진의 역사를 찾아 평생 걸어온 길

희미해져가는 향토에 대한 긍지 심어주어야…

“호마는 언제나 북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향해서 울고, 월나라에서 온 새는 남쪽으로 벋은 가지에다 집을 튼다”(胡馬依北風, 越鳥巢南枝)

지난 해 말 발간된 『당진향토사소고(唐津鄕土史小考)』에서 저자인 신양웅 교장은 이 고시(古詩)를 인용해 근본의 중요성을 말하며, 우리의 근본인 향토의 옛 자취를 하나하나 찾아내어 조상들의 얼과 슬기를 되살리고 희미해져가는 향토에 대한 긍지와 자랑을 심어주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석문면 장고항리에서 태어난 신양웅 교장은 어렸을 때부터 역사소설을 많이 읽었다고 한다. 책을 통해 역사에 대해 흥미를 느끼기 시작한 신 교장은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하게 된다.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40년 전, 신 교장은 석문중학교에 국사선생님으로 부임한다. 그가 부임한 후 석문면에서 유물이 하나 둘 발견되기 시작하면서 신 교장은 선사시대의 유물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학생들과 교직원 그리고 지역 주민들의 도움으로 차곡차곡 모아 온 유물들이 지금은 1천여 점을 넘는다.

신 교장은 당진에서 출토된 소중한 유물들의 온전한 보전을 위해 작년 9월에 석문중학교 에 향토유물실을 만들었다. 이 곳에 석기시대와 청동기 시대의 돌도끼와 돌칼 등 사냥도구와 농사에 쓰였던 농기구, 토기조각, 고서적, 자기류 등과 각종 생활용품들을 전시해 놨는데 선사시대의 유물 뿐만 아니라 1900년대의 유물까지 전시돼 있어 학생들에게 소중한 산교육의 장으로서의 역할은 물론이고 관람을 원하는 일반인들과 외국의 학자들까지 이 곳을 방문하고 있다.

특히 이 곳에 전시된 유물 중에서 연석(맷돌)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발견된 것으로 온전한 모양을 갖추고 있어 우리나라 어느 박물관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귀중한 유물중 하나다.

처음 이것을 발견했을 때는 어느 용도로 썼던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각 박물관과 대학교 교수들에게 고증을 부탁했지만 아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그 후 초락도 움집터를 발굴하러 왔던 충남대 윤무병 교수에게 그 유물을 보여줬고 나중에서야 이것이 구석기시대에 쓰였던 연석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고 한다.

연석은 곡식을 올려놓을 수 있도록 가운데가 약간 들어가 있는 넓적한 갈판과 곡식을 갈 수 있도록 실패 모양처럼 가로로 길게 생긴 갈돌로 구성되어 있다.

신 교장이 향토사를 연구하면서 가장 공을 들였던 것은 소난지도 의병항쟁에 관한 연구이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국권을 침탈당하게 되자 수원지방에서 봉기하여 활약하던 홍일초 휘하의 의병들이 일본의 초토화 작전에 밀려 홍주전투에서 패퇴한 의병들과 합류해 당시 호남지방 관곡 운반선들의 중간 정박지였던 석문면 소난지도에 주둔해 후일을 도모했다.

그러나 이를 탐지한 일군이 1907년 1개 소대의 병력으로 솔가지로 위장한 배를 타고 기습침투함에 따라 밤새도록 총격전을 벌였다. 이튿날 의병들의 탄약이 떨어지면서 섬 동쪽끝 둠바벌까지 밀려 육탄전으로 대항하다 150명 전원이 전사하는 비운을 겪었다.

소난지도 의병항쟁에 대한 연구는 1970년대에 소난지도 주민들로부터 의병총이 있다는 말을 들은 석문중학교 신이균 이사장과 김부영 교장 등이 현지를 답사한 것이 시초가 되었다.

처음 그 곳에 갔을 때는 봉분이 없어진 상태였다. 인골가루가 질병에 좋다고 해 사람들이 파갔다는 말이 떠돌고 있던 터였다. 당시 석문중학교 학생들과 교직원은 우리 고장에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의병의 넋을 기리고 애향심을 고취하자는 뜻으로 주민들의 협조를 얻어 흩어진 유골들을 수습하고 묘역을 만들어 매년 현충일에 150의병들에 대한 참배행사를 거행하기 시작했다.

신 교장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계속해 사료를 수집하는 등 소난지의병총에 대한 연구를 지속했다. 그 결과 82년 8월5일에 의병총비를 건립하게 됐다. 87년부터는 석문면과 석문면 번영회가 주관하여 추모제향을 봉행하다 97년 5월 16일 소난지의병항쟁기념사업회가 발족하여 군 전체의 추모식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이 연구를 하는 동안 신 교장에게는 많은 난관이 있었다. 소난지의병총에 관한 고증이 되지 않아 연구활동에 대한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작년에 드디어 『한국독립운동사』에서 소난지의병총에 관한 기록을 찾게 된 것이다. 소난지의병총에 관한 연구는 신 교장의 향토사에 관한 끈질긴 집념과 우리 고장 당진에 대한 애착이 불러온 쾌거라 할 수 있다.

소난지도 의병항쟁과 관련해 신 교장은 홍일초 의병장과 함께 경기도 수원 등지에서 활약한 고대면 용두리 출신의 정주원 의병장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신 교장은 조만간 고대 공설운동장에 정주원 의병장의 동상을 세울 계획이라고 한다.

신 원장은 이 밖에도 과거 당진의 지명, 전통문화, 당진 출신의 인물 등에 관한 다수의 저서와 논문을 썼으며 63세의 나이에도 아직까지 활발한 연구활동을 하고 있다.

역사에 관한 한 미개척분야가 아직도 많이 남아있어 지금도 계속해서 새로운 사실들이 발견된다고 말하는 신 교장은 그렇기 때문에 새로 나온 책들을 틈틈이 들여다 보고 세미나에도 자주 참석해야 새로운 정보를 얻을 수 있고 남들에게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옛날 돌맹이 하나 발견한다고 나한테 돈이 생깁니까? 밥이 생깁니까? 그저 내가 공을 들인 것에 대한 성과가 있으면 그것에 만족하는 것이지요.. 가치있는 유물의 발굴이나 어떠한 역사적 사실을 발견했을 때, 느끼는 희열은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개인적인 만족감이지요.”

그러나 신 교장의 연구는 개인의 만족을 넘어 서 당진군민 아니 국민 모두가 우리나라의 역사에 대해 자긍심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결과물이 아닐 수 없다.

신 교장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당진의 유물을 발굴하는데 힘쓰겠다고 말했다. 뿐만 아니라 “당진에는 독립운동가가 많습니다. 그분들의 업적과 자손들을 찾아내는 일을 계속할 생각입니다”라며 내 고장의 역사찾기에 온힘을 기울이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참고문헌 및 고증자료 : 한국유적 총람(문공부 편), 한국독립운동사자료집

이필용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