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 지난 13일 군청 대회의실에서 소난지도 의병항쟁 학술용역 최종보고회가 열렸다.
충남대학교 충청문화연구소 김상기 소장과 석문중학교 신양웅 교장, 박상건 전 조금초등학교 교장, 김낙성 군수 등 군내 관계자 40여명이 모인 이번 최종보고회에서는 1970년대 석문중학교 교사들이 말로만 전해지던 소난지도 의병무덤을 발굴하면서 시작된 소난지도 의병항쟁에 관한 확인작업이 수십년간의 노력 끝에 확실하게 증명되는 자리가 됐다.
1905년 을사조약의 늑결 후 의병들이 전국적으로 크게 늘어나는 가운데 석문면 소난지도의 지형적인 조건으로 수적들이 점차 의병화 되면서 의병들의 근거지로 탈바꿈했다.
1908년 들어 당진 일대에서의 의병활동이 활발해 3월9일 의병들이 당진읍내에 들어와 박사원을 붙잡아 북창으로 연행, 주민들 앞에서 밀정이라 하여 공개처형하는 사건이 있었다(의병항쟁의 발단으로 봄). 이 보고를 받고 홍성경찰분서에서 3월13일 일본인 순사 7명과 한인순사 8명 등 15명이 파견돼 14일 하루종일 이 일대를 수색하다 소난지도에 의병들의 본거지가 있다고 판단했다. 이에 15일 아침 6시 배를 타고 소난지도 앞에 도착하여 포구에 정박해 있는 의병측의 배 2척을 확인하고 사복을 입은 순사로 하여금 정찰을 시켰지만 의병측에서 이를 미리 탐지하고 경찰대와 총격전을 벌인 것. 이 총격전에서 한인순사 나춘삼이 이마에 부상을 입었다. 그러나 경찰대가 상륙을 강행해 서쪽 고지로 근거지를 옮겨 항쟁하게 되었다. 의병들은 화력의 열세를 이기지 못하고 고지 뒷쪽의 절벽 아래로 뛰어내릴 지경이었다. 다시 북쪽 산악지대의 동굴 속에 숨은 의병의 맹렬한 사격이 있었으나 이 접전에서도 의병 5명이 전사했다. 의병은 계속 추격을 당해 오전에 크게 피해를 입은 지역에서 14명이 또 다시 전사했다. 오후 3시경 전투는 끝났고 선봉장 박원석을 비롯해 총 41명이 전사, 9명이 부상을 입고 체포되면서 의병은 대패를 당한다. 나머지 의병 50여명 내외는 바다에 투신해 행방불명됐고 이들 역시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실제로 소난지도에서 약 100명에 달하는 의병이 주둔하고 있었으며 이들은 거의 전사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경찰대는 부상당한 포로 의병을 선원과 함께 배에 붙들어 매고 학살한 것으로 보이며 의병으로부터 노획한 다수의 식량을 소각했다.
다행히 의병장 홍원식은 중상을 입은 채 숨어 있다가 섬을 빠져나와 고향인 화성군 제암리로 돌아가 계속해서 항일투쟁을 전개, 1919년 3·1운동을 주도했다. 그러나 일제에 의해 제암리 교회에서 부인 김씨와 순국했다. 홍원식은 홍일초와 동일인물인 것으로 현재까지는 파악되고 있다. 그러나 선봉장은 박원석에 대해서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용역책임자김상기
충남대 국사학과 교수
지난 70년대부터 석문중 교원 중심으로 추진된 사업이 이제는 어느 정도 학문적으로 정리된 것 같다. 학술세미나를 통해 학계의 엄연한 공증을 받은 셈이다.
선봉장 박원식이라는 분의 후손이 계시지 아닐까 생각된다. 이러한 후속사업들이 지속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당진군의 소난지도 의병 유적지 성역화 사업이 요구된다. 의병이 피신했던 동굴은 아직 발견하지 못했지만 현지를 발굴해, 바다와 섬을 잇는 관광벨트화 사업으로 추진했으면 한다.
자료를 보면 한인경찰들에게 의병이 죽었다. 일본은 조직적, 의도적으로 한인경찰을 모집하는 등 밀정 행위가 있었다. 일제는 교묘하게 신분제도 이용해 독립운동가 등을 체포, 고문했다. 의병정신과 민족정신 고취 등은 국가적 차원에서 매우 중요하다.
홍정연 기자 jyhong@djtimes.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