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이 그리워도 못가는 신세...'

이 노래가사는 아버지께서 술자리에 앉으시면 항상 애창하시는 구절이다.

어느덧 고향을 떠나신지 반세기가 흐른 지금 유난히도 고향을 그리워하신다.

아버지는 방년 68세로 쇼와9년에 함북 청진태생이시다.

아버지께서는 만약 그때 월남하지 않았으면 우리식구들은 부르주아로 선정되 숙청되었을지 모른다며 오히려 남으로 내려온것이 다행으로만 여기셨던 아버지.

친할아버지께서는 고향 청진에서 대형약국을 경영하셨는데 당시 김일성을비롯한 고위급 당 간부들이 단골로 이용했다고 한다.

때문에 사회주의정부이 수립된 이후 토지소유주등 자산가들은 부루주아로 취급되어 전원 숙청되고 모든토지를 국유화했다지만 할아버지만은 그 대상에서 제외되셨다.

따라서 지금도 그 문서가 그대로 남아있다고 하셨다.

아니 세월이 흐름에 따라 화폐가치가 늘어나면서 재산이 더 증가했을지도 모른다고 하셨다.

당시로써는 고위급인사들만이 주로 사용할 수 있을 정도의 가치가 높은 약품이었다고 하셨다.

아버지는 현재 60후반이시지만 얼핏보면 40대 후반으로 보이실 정도로 정정하시다. 아니 동안이라고 표현해야 옳을 것이다!

체격도 미국의 아놀드슈왈츠제네거는 저리가라일 정도이다.

지긍은 많이 야위셨지만 젊어을때,즉 내 나이때만 하더라도 세계몸짱대회에 나가셨다면 1위를 거머쥐셨을 것이다.

아버지를 자랑하려고 글올리는것이 결코 아니다.

30년 넘게 모 제과회사에 근무하시는데 새벽 4시면 출근하셔서 저녁무렵에나 퇴근하신다.

무녀독남이었던 아버지는 1.4후퇴때 중공군의 공습을 피해 경원선을 타고 어머님을 따라 을지로에 정착을 하셨다.

할아버지는 6.25가 발발하면서 포격으로 돌아가셨고 이모,고모,유모,사촌등 친척을 청진에 남겨 둔 채 어머니와 단둘이 남하했다고 회고하셨다.

아버지의 종교는 불교였지만 배타적인것을 싫어하셔서 독실한 기독교인이던 지금의 내 어머니와 결혼하셨다.개종한것은 아니지만 아버지는 어머니의 신앙과 가족사에 감동해서 구애를 한 것이다.

두분의 선친 모두 김일성과 각별한 관계가 있었던것도 인연이 되었다.

이 글을 보고 '좌경용공분자'로 오해할지 모르나 초대대통령 이승만 또한 기독교인으로 필자의 어머니와 부친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고 한다.

어머니의 부친이자 나의 외조부님을 경무대에 영입하려했던 것도 그러한 인연이었다

지금의 내 어머니를 만나 결혼하신 이유가 일리가 있었다.

두 분의 선친 모두 6.25때 30대초반의 어린(?)나이에 돌아가시고 김일성과 아는 사이였고 의료계에 종사하셨고 왕손이라는 점에서 일치했다.

지금은 현실에 만족하며 살고있지만 가난때문에 평생 꿈이던 종교인의 뜻을 포기해야만했던 아픈 기억은 지울 수 없다.

순복음교회를 능가하는 대성전을 개척하여 역사에 남는 종교인이 되어 종교갈등이없는 나라,기독교를 부정하지않는 나라 우리나라 좋은나라로 만들겠다고 다짐하던 나의꿈은 궁핍한 연극인으로 그쳤지만 남북통일이 되어 내 꿈을 다시 펼 수 있는날을 기대한다.

그리고 나의 아버지.

머지않아 남북한 철도가 연결되고 북녘땅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그러한 날이다가오면 비로써 아버지의 한은 사라지겠지요!

우리만 아니라 천만 이산가족의 한이 완전히 사라지는 그날이 언젠 가는 오기를 기대하며 반쪽의 나라에서 오늘도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