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보부도 등 경기침체로 큰 성과없이 끝나 당진시 승격운동의 시발점이었던 ‘군민화운동’이 시작된 지 10여년이 흐른 2005년. 변화한 지역경제 지형 속에서 시승격추진위원회가 지난 4월11일 새로이 출범했다. 당진군을 시로 만들자는 운동은 10여년 전인 1996년, 민선군수 1기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인근 논산시가 3월1일자로 시승격 되었고 이에 자극을 받은 당진군은 군내에 거주하고 있는 상시 거주민을 상대로 한 ‘군민화운동’에 들어갔다. 이 운동을 주도한 단체는 ‘새마을’이었다. 당시에는 한보철강이 정상적으로 가동되는 시점이어서 당진군에 상주하는 인구는 시승격 기준을 초월한 15~16만명인 것으로 추정됐다.
그러나 주민등록상의 인구는 1996년 6월 현재 12만3천여명. 즉 당진에 살면서도 자녀교육 등을 이유로 전입신고를 하지 않은 인구가 3만여명을 웃도는 것으로 집계됐다. 이들을 당진군민화 하는 것이 최우선 목표였다.
취임 1주년을 맞는 시점이었던 당시 김낙성 군수는 각 읍·면을 일일이 방문해 새마을지도자, 부녀회장 들에게 군민화 운동 상담요원 위촉장을 주고 이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줄 것을 당부했다. 당시‘군민화 운동’은 교부세 배분 등에서의 불이익 등 예산지원 차등의 문제점이 표면화된데 따른 것이었다. 재정자립도는 충남도내에서 천안시 다음으로 높은 상황임에도 교부세 배정에서 시와 비교해 현저히 떨어진다는 사실은 많은 인구가 몰려 살면서 감당해야 할 제비용은 증가하는 반면 정작 시승격에 따르는 막대한 예산상의 혜택은 받지 못하는 불이익을 타파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이 운동은 전군민적인 공감대 형성이 채 이뤄지기도 전에 이듬해 한보부도라는 악재를 만나면서 흐지부지해졌다. 한보철강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다시피했던 당진경제는 침체의 늪으로 빠져들었고 고용인력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새마을운동 당진군지회 이민선 사무국장은 “당시 당진의 환경이 주민등록을 옮겨 정착하고 싶게 만드는 욕구를 전혀 불러오지 못할 정도로 열악했던 것도 ‘군민화운동’이 큰 성과를 내지 못한 한 이유”라고 평했다.
아무튼 그 당시 군민화 운동은 비록 큰 성과없이 끝났지만 ‘시승격’이라는 지향점을 처음으로 지역에 던졌다는것과 이를 실천에 옮겼다는 사실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운동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