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가 ‘친일인명사전 수록인물’ 1차 명단을 발표한 이후 각 지역에서 친일 문화예술인들을 주제로 하던 기념사업이 잇따라 취소되고 있는 가운데 당진지역에서도 친일인사들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지난 1997년 12월30일 발행된 당진군지 하권 ‘인물’편은 이종린을 ‘독립투사요, 정치가이며 언론인’으로 소개하며 1919년 3·1운동 당시 조선독립신문을 발행했다가 옥고를 치른 일과 1922년 언론집회압박탄핵회 민중대회위원장으로 투쟁하다가 검거된 사실 등을 열거하고 있다.
그러나 친일로 돌아선 1930년대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그후 천도교 통일기성회 위원장, 천도교 중앙위원회 대표, 천도교 현기관장, 천도교대종사장, 제20·22대 천도교 교령을 역임하였다”라고만 기록돼 있다.
이종린이 일제 초기 언론인으로 항일운동에 투신, 여러번 검거돼 옥고를 치르고 단편소설가로서 문학사에 기여한 점은 인정한다고 해도 1930~1940년대의 친일행적을 제대로 기록하지 않음은 오욕의 역사를 바로잡고 후손들에게 교훈을 남길 기회를 박탈한다는 점에서 올바르지 못하다는 지적이다.
따라서 정확한 기록과 평가 아래에서 그가 사후에 받았던 국민훈장 무궁화장에 대해서도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안승환 한터우리문화연구소장은 “공은 공대로 봐야 하겠지만 과도 과대로 봐야 한다”며 “이종린이 초기 항일운동과 문학사에 기여한 사실을 인정하지만 일제 말기에 친일을, 그것도 적극적 친일 행위를 한 사실도 분명히 기록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군민들 세금으로 만든 당진군지가 이종린의 친일행적에 대한 내용을 전혀 기록하지 않은 것은 누가 보더라도 비정상적”이라며 “사실에 대한 정확한 기록을 통한 인물 재평가 작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역시 당진군지 하권 ‘인물’편에서 인태식에 대한 설명을 보면 “정치인으로 본관은 교동이니 익수의 2남으로 석문면 통정리에서 출생해 성장했다. 1927년 일본 동경제국대학 법문학부를 졸업했다”고 기록돼 있으며 그 다음 기록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로 넘어간다.
일제시대 총독부 관리를 거쳐 1938년 홍천세무서장이 된 후 청주세무서장 등을 역임하며 친일행위를 한 사실은 누락됐다.
물론 인태식은 해방 후 공직에 재직하면서 서울에서 공부하던 당진출신 학생들을 위해 도움을 준 것도 사실이나 그렇다고 친일행위를 덮을 수는 없다.
그의 행적에 대한 분명한 기록과 조사가 필요하며 이 같은 평가 하에서 당진읍 읍내리 남산에 세워진 송덕비에 대해서도 후손들의 올바른 역사인식을 위한 조치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당진참여연대는 인태식의 송덕비와 관련해 친일행적에 대한 분명한 내용을 담은 알림판을 비 앞에 세우는 등의 운동을 검토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