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익순(63세)씨가 사는 곳은 석문면 초락2리, 광활한 대호간척지가 한눈에 들어오는 곳이다.
초락도 버스종점 왼쪽에 있는 똑같은 모양의 집단 취락지구에서 덩그마니 떨어져 나와 조립식으로 지어진 집 한 채가 그의 보금자리다. 대문을 열고 나서면 어김없이 마주치는 수십만평의 간척지를 벙어리 냉가슴 앓듯 망연하게 바라 보기만 하며 살아온지 벌써 5년째다.
육십평생을 사는 동안 단 한번도 초락도를 떠나 본 적이 없다는 가씨. 낙지며 굴, 갯지렁이 없는 게 없었던 대호만 갯벌이 거대한 방조제 공사로 논으로 바뀌면서 가씨의 삶도 헝클어지기 시작했다.
농사채도 없이 전적으로 바다에만 의존해 살아왔던 그는 바다가 막히면서 그 댓가로 어민들에게 주어지기로 했던 간척농지를 단 한평도 받지 못했던 것이다.
작은 아들인 그는 초락도에서 태어나고 자라 그곳에서 가정을 꾸렸지만 세대분리를 해놓지 않았던 것이 화근이었다. 농지는 세대를 기준으로 1세대 1구간씩 분배돼 부친의 호적아래 있었던 그는 엄연히 한 가정의 가장이었음에도 농지를 받지 못했다.
곳곳에 억울한 사연을 적어 진정도 해보았지만 ‘당신 하나 때문에 법을 바꿀 수 없다’는 냉랭한 답변만 돌아올 뿐이었다.
“바다를 막아 논을 만들었으면 그 논은 당연히 바다를 이용해 먹고 살던 사람들에게 줘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법은 상식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가씨 뿐만 아니라 이 마을에서 가동현·가유현씨도 가씨와 비슷한 사연으로 농지를 분양받지 못했다. 이웃 초락1리에서도 몇명 더 있다.
누락자들의 민원이 들끓자 농진에서는 지난 94년 누락자들에 대한 재조사를 벌여 농지를 분양해주기로 했다. 그러나 애매한 기준을 이용해 엉뚱한 사람들이 너도 나도 피해어민이라며 신청을 하는 바람에 누락자들에 대한 농지분양은 없었던 일로 되어버렸다.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릅니다. 이곳에서 안 살았으면 모르는데 평생을 갯고랑 파며 살고서도 어장 뺏기고 그 넓은 간척지 한 평도 차지하지 못한 심정은...”
가씨는 어장을 잃은 후 농진의 간척공사 현장사무실에서 청소부로 일하며 생계를 이어나갔다. 부인은 식당에서 일을 했다. 혹시나 하며 기회가 오길 기다리며 몇년을 살았을까? 공사는 끝이 났고 현장사무실은 철거됐다. 오갈 데 없어진 가씨는 현장사무실이 있던 자리에 무작정 조립식 주택을 지었다. 불법이라며 철거하라는 농진쪽의 독촉이 이어졌지만 가씨에겐 더이상 물러나 앉을 터전이 없었다.
자식들이 보내주는 용돈으로 근근히 살아가는 가씨는 며칠전 척추디스크 수술을 받았다. 염밭(염전)에 나가 소금 긁는 일을 하느라 몸이 축났다는 부인 역시 3년전 같은 질환으로 수술을 받았다. 이들에게 당장 농지가 주어진다 해도 농사 지을 여력이나 있을지... 가씨부부는 그래도 농지 몇평 얻는 소망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환경농업한다, 협업농에게 빌려준다며 몇만평 분양하지 않은 농지가 있는 걸로 압니다. 그것만이라도 억울하게 땅을 차지하지 못한 이들에게 빌려주길 바랄 뿐입니다.”
논 몇평 농사지어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길 바라는 것도 아니었다. 오랫동안 뼈에 사무친 소외감과 ‘못나서 그렇게 됐다’는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살아야 했던 지난날을 그는 어떤 형태로든 보상받고 싶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