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산면 가곡2리에 사는 김성창(54세)씨는 주위에서 ‘지독한 사람’ 소릴 들을 정도로 억척스럽게 살고 있다. 원래 일밖에 모르는 성실한 사람이기도 했지만 바다일을 못하게 되면서부터 억척스럽지 않으면 살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김씨는 몸둥이 하나로 한창 돈 들어갈 시기를 가까스로 넘기며 살고 있다. 막내딸은 고3, 위로는 모두 대학에 다니는 3남매가 있다. 자녀들 학비며 용돈, 하숙비로 들어가는 돈만 매월 3백만원이 넘는다.
가지고 있는 재산은 논 5천평. 이것만으로는 어림도 없어 나이들어 농사 짓지 못하는 이웃들의 땅이 나오는 대로 잡아 모두 1만5천평을 경작하고 있다. 농한기 때에는 당진화력이나 동부제강 등으로 노동일을 다니고 있다. 그렇게 몸바쳐 일을 해도 한해 결산을 하고 나면 남는 건 없이 해마다 늘어나는 게 빚이다.
김씨는 10년전 해태양식으로 짭짤한 소득을 올렸다. 김씨 뿐만 아니라 가곡리 사람들 거의가 드넓은 뻘밭에서 낙지, 소라, 동조개 등등을 채취해 자식들을 가르쳤다. 8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시작된 김양식은 이곳 주민들에게 부촌을 꿈꾸게 해준 전령사였다.
가을걷이를 끝내고 12월부터 이듬해 2~3월까지 서너달동안 김농사를 지으면 어디가서 아쉬운 소리 하지 않아도 됐다. 김씨는 이 마을에선 꽤 넓은 김양식장을 갖고 있었다. 비록 수협 빚을 얻어 차렸지만 60책의 양식장에서 겨울 한철 동안 올린 소득은 그때 돈으로도 1천만원이 넘었다. 그러나 좋은 세월은 5년 뿐이었다.
돈이 좀 모아졌다 싶어 멀리 목포에까지 내려가 중고 건조기까지 사들여 놓았지만 겨우 1년을 쓰고 창고에 묵혀둬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석문간척사업이 시작된 것이다. ‘책’당 90만원의 보상비를 받고 효자노릇 해준 양식장을 내어 주었다. 그나마 김씨에겐 땅이 있어 당장 굶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됐지만 커가는 자식들 학비 걱정은 어쩔 수 없었다.
자식교육에 대한 열정은 여느 부모와 다름없이 뜨거웠지만 그도 한계가 있었다. 대학재학 중 입대했던 작은아들이 제대를 하고 곧바로 복학을 해야 했지만 형편이 따라주질 않아 1년을 쉬게 했다.
그럴 때마다 김씨는 바다를 막기 시작한 지 10년이 넘도록 농지가 되어 돌아올줄 모르는 석문간척지를 원망한다. 아니 10㎞가 넘는다는 길고 긴 방조제를 원망한다.
“차라리 터졌으면 좋겠다. 그러면 당장이라도 김양식을 하겠다.”
창고안에서 먼지를 쓴 채 녹슬어가는 건조기를 들여다 보며 김씨가 던진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