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무데도 의지할 곳 없는 무의탁 어르신들이 모여사는 당진읍 구룡리 평안마을. 이곳 어르신들은 행여 찾아 올 누군가를 기다리기라도 하듯 낮동안엔 대부분 현관에 나와 앉아계신다. 그러나 4호실 할머니들은 다르다. 말없이 현관에 나와 있는 것보다 방안에서 서로 이야기 하면서 소일하기를 좋아한다. 이야기라봐야 모두 과거사이지만 그 과거속엔 보고싶은 사람들이 있기에 할머니들은 매일같이 똑같은 이야기들을 하고 또 한다. 할머니들의 과거속엔 하나뿐인 아들도 있고 젖먹이 때 고향에 두고 온 딸도 있고 생이별 뒤 임종도 못지킨 남편이 있다.
“내가 고향이 황해도 옹진이여. 남편은 6.25 때 대한청년단장이어서 인민군한테 총살 당했지. 둘째딸년 업고 1.4후퇴 때 피난을 내려왔는데 나만 빠져나오기가 미안해서 여섯 살난 큰 딸은 시댁에 두고 왔어. 사나흘만 있다 오마 약속하고 떠났는데 그게 50년이 되었어. 지금은 생사도 모르지.”
아직도 이북 사투리가 남아있는 김성림(81)할머니는 얼마 전 유일한 핏줄이었던 둘째딸마저 잃었다. 피난을 내려와 당진에 정착해 살면서 삯바느질에 날품팔이, 사방공사 등 안해본 일 없이 고생하며 키운 딸이 자신보다 먼저 세상을 버리자 더 이상 살아갈 의욕을 잃어버린 것이다. 물론 사위와 손녀딸들이 있지만 홀아비가 된 사위에게 할머니는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자신은 오래전부터 앓아 온 관절염으로 거동이 불편한 몸이었다.
“죽은 딸도 보고 싶지만 사실은 고향에 두고 온 큰딸이 더 보고 싶어. 죽었는지 살았는지...이산가족 찾기할 때 군청에 신청도 해봤는데 못찾았어. 이름이 순덕이야. 고순덕. 순하다고 해서 할아버지가 지어 준 이름이지. 죽기전에 한번만 보았으면 소원이 없겠어.”
태안 학암포가 고향이라는 문례(89) 할머니는 우울증을 앓고 있다. 슬픈기색이 주름가득한 얼굴에 그득하다. 자식 이야기만 나오면 금새 눈시울이 붉어진다. 벌써 2년째 하나 뿐인 아들의 목소리조차 들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혼과 함께 분가해 살던 아들은 혼자 사시던 어머니가 양로원엘 가는 걸 극구 반대했다. 자식 얼굴에 먹칠을 하는 일이라고 여겼다. 어머니도 사실 원치 않았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어지러움증이 심해져 어머니는 혼자 밥을 해먹고 살 수가 없었다. “느이집에 들어가 살랴?”하고 물었지만 며느리는 끝내 답을 주지 않았다. 하는수 없이 야반도주하듯 이곳 평안마을에 들어왔다. 어머니의 그런 속사정은 아랑곳 없이 아들은 자신의 체면을 구긴 어머니가 용서할 수 없을 정도로 원망스러웠던 모양이다. 전화를 해도 받지를 않았고 단 한번도 찾아오지 않았다. 어머니의 생일날에도 명절날에도...
“생일, 명절 그런날 돌아오는게 젤 싫어. 서른도 안돼 남편 죽고 그거 하나 바라보고 살아 왔는데 이젠 얼굴도 못보고 살다니...”
아들 교육을 위해 무작정 서울로 올라가 생선도 팔고 비누도 팔고 남의 집 식모살이도 했다. 별보면서 나갔다가 별보면서 들어 온 세월이 몇해였나. 그렇게 기막히게 키운 아들인데 어머닌 지금 그 아들의 목소리만이라도 들어보길 간절히 바라고 있다.
“부모는 하루에 백번을 자식생각 한다면 자식은 한번 부모 생각할까 말까여... 까짓거 인저 나두 포기했어. 그저 건강하게 살어라 하고 바랄뿐이지.”
어머닌 아들의 건강 걱정에 손주걱정까지 하신다. 요며칠 눈이 많이 왔는데 인천에서 서울로 출퇴근하는 손주가 눈길에 행여 잘못되지 않을까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송산면 무수리에서 살다가 3년전 평안마을에 들어왔다는 정수길(82) 할머니. 세 아들을 먼저 보내고 두딸이 출가한 후 남편과 농사지으며 살다가 남편마저 세상을 떠나자 이곳에 오게 되었다. 할머니는 젊었을 때 집에 불이 나는 바람에 얼굴이 온통 화상을 입어 일그러졌다. 그때 마침 젖먹이 아들이 있었는데 화상으로 입이 오그라들어 먹지를 못하자 젖도 나오질 않아 겨우 보리쌀 물을 먹였으나 어린아들은 견디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또다른 아들은 열다섯살 먹어 익사사고로 먼저 보냈고 둘째는 병으로 잃었다.
정할머니 역시 시집간 딸들에게 의지할 수 없는 형편이어서 이곳을 선택했다.
“사위가 암으로 고생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어떻게 살고 있는지... 오늘은 전화라도 해봐야 겠네.”
부여에서 살다 온 이월례 할머니는 배다른 아들 며느리와의 갈등으로 남편과 생이별을 해야했다. 1년전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었을 뿐 남편의 임종도 보지 못했고 묘가 어딘지도 모른다.
“어차피 죽은 사람, 산소가 어딘지 알면 뭘해... 나도 죽을날만 기다리며 사는거지.”
할머니들은 이곳 생활에 별 불편이 없다고 했다. 단체생활이다보니 아무래도 혼자살던 시절보다 자유롭지 않아 처음엔 힘들었지만 비슷한 처지의 할머니들과 아웅다웅 어울리다보니 ‘그런대로 살기 괜찮은 곳이 되었다’고 한다.
아플때 약도 주고 치료도 해주고 삼시 세끼 밥도 먹여주고...사는데 불편은 없지만 자식, 손주들에 대한 그리움만은 어쩔수가 없다. 세월이 흐를수록, 주름이 깊어갈수록 어머니들의 그리움도 깊어간다. 겨울이 깊어가듯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