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농아인협회가 운영하는 당진군 수화통역센터에서 통역사로 활동하는 표민애씨. 청각장애를 갖고 있는 그는 당진에서 10년간 살면서 농아들을 위한 수화교육과 통역봉사를 해왔다.
▲ 농아인협회가 운영하는 당진군 수화통역센터에서 통역사로 활동하는 표민애씨. 청각장애를 갖고 있는 그는 당진에서 10년간 살면서 농아들을 위한 수화교육과 통역봉사를 해왔다.

청각장애 딛고 비장애인과 농아들의 가교역할

제 26회 장애우의 날을 맞는 표민애(당진읍 시곡리, 48)씨의 마음은 특별하다. 지난 20일 부여에서 열린 충남 장애우의 날 기념식에서 장애극복상 수상자로 당진에서 유일하게 선정돼 도지사 상을 수상했기 때문이다. 당진에서 살아온 지 꼭 10년이 되는 해에 큰 상을 받았기에 더욱 의미있는 날이었다. 그렇게 의미있는 날에 그녀의 남편(에바다 농아교회 박경인 목사)은 못자리 하는 교인 집에 일손을 도와주러 가 시상식장에 함께 나오지 못했다. 자신들도 청각장애를 갖고 있는 이들 부부는 봉사가 곧 본업이자 삶의 목표다. 듣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고 교육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아 가족과, 사회와 단절된 채 살아가는 농아들이 그들의 언어인 수화를 배워 세상과 만날 수 있도록 해주는 것, 그리고 의사소통의 부재로 생겨나는 온갖 오해들을 풀어주는 것, 그 일들을 이들 부부는 사명으로 알고 해오고 있다.

점점 잃어가는 청력,

‘말하기’ 잊지 않으려 몸부림

표민애씨는 현재 당진군 수화통역센터에서 농통역사로 활동하고 있다.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수화교실을 운영하고 의사소통이 안돼 불편한 농아들이 센터를 찾아오면 함께 나가 통역을 해주는 일도 그의 몫이다. 표씨는 청각장애 3급이지만 상대방의 입모양을 보고 언어를 구사할 수 있다. 고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듣는 것이 가능했기에 청력을 완전히 잃기 전에 배운 말하기 능력을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고등학교때까지 제가 청각장애라는 것을 몰랐어요. 어느날 친구들이 내 어깨를 툭 툭치며 ‘민애야 너 왜 그렇게 못 듣니’ 이 말을 몇 번 들은 후에야 제 귀가 이상해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죠. 어렸을 적 감기를 심하게 앓은 적이 있다고 하는데 그때 어머니께서 주사를 직접 놔주셨대요. 그때 마이신 중독에 걸린 것이 아닌가 하는 진단도 있는데 아무튼 제가 청력을 잃게 된 정확한 원인은 아직도 모르고 있어요.”

그래서 그는 비장애인들과 함께 학교를 다녔다. 그리고 뒤늦게 알게 된 ‘못 듣는다는 사실’에 삶의 목표를 잃고 방황하다가 신학대학에 가라는 어머니의 권유에 대학엘 들어갔다. 4년간의 대학생활은 그러나 하나도 재미가 없었다. 듣질 못하니 수업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다만 그 기간동안에 그가 피땀흘려 한 일은 바로 말하기 능력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점점 청력이 떨어지면서 그가 만나는 비장애인의 숫자도 줄어들었고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장애인들과 어울리게 되면서 자칫 말하기 능력을 상실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말을 잊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책은 항상 크게 소리 내어 읽었고 친구들 사이에선 한 마디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온 신경을 곤두세워 그들의 말을 들으려 했고 가장 많이 말을 하려고 노력했다. 그것은 외톨이가 되지 않으려는 몸부림이기도 했다. 그런 노력의 결과  그는 지금 비장애인과의 대화에 전혀 문제가 없다. 자신의 목소리를 듣지 못함에도 말할 때 그의 목소리 톤은 늘 일정하다. 그래서 간혹 ‘가짜장애인’취급을 받기도 한다는 그를 보고 있으면 신기함과 동시에 이렇게 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을지, 그 간난한 세월들이 저절로 읽힌다.

남편과의 만남

그가 평생 동반자인 남편을 만난 건 대학 졸업 후 평택에 있는 에바다 농아교회에서 보모로 일하게 되면서부터였다. 남편은 그 당시 그곳에서 기거하며 신학을 공부하고 있는 학생이었다.

“처음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어요.(웃음) 농아인데다 부모님과 형제자매 아무도 없는 고아였고 저보다 나이도 두 살이나 아래였거든요. 그런데 그 사람은 아니었나 봐요.”

친정식구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식을 올린 두 사람은 농아선교에 평생을 걸기로 하고 이곳저곳을 다니며 전도활동을 했다. 마산에서, 제주도에서, 지금의 당진으로 오기까지 한 곳에서 머문 기간은 2년 남짓. 항상 떠난다는 마음으로 덩치를 가볍게 하고 살았지만 생계가 보장되지 않는 일이었기에 표씨는 부업으로 감귤농장에서, 남의 집 가정부로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고 살아왔다. 당진에 와선 4년 동안 호떡장사를 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항상 두 부부의 몸은 그들만의 것이 아니었다. 호떡을 팔다가도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와서 통역 좀 해달라’는 농아들의 부탁이 있을 땐 열일 제쳐두고 사고현장에 가서 통역을 해주었다. 그러다 돌아오면 해는 지고 그날 장사도 접어야 했던 때가 한 두번이 아니었다.

학업에 대해 늘 목말라했던 표씨는 호떡장사가 생활을 지탱해 주는 수단이기는 했지만 자신의 미래를 보장해 주는 일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다른 농아들에게 좀더 필요한 존재가 되는 것, 그 사회적인 책임감속에서 살아 온 그는 남을 가르치기 위해선 자신이 먼저 배워야 한다는 생각에 재작년 평택에 있는 재활복지대학 수화통역과에 입학을 했다. 장학금까지 받으면서 모범적으로 학교생활을 해왔던 그는 그러나 불과 한 학기를 마친 뒤 휴학을 해야 했다. 생활고가 발목을 붙잡았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즐겁고도 보람있는 일이라고 했다. 비록 얼마되지 않지만 일정액의 보수도 받으면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건 큰 축복이라면서.... 그러나 학업에 대한 미련은 평생 남을 것이라고 했다.

수화를 배우세요,

장애인 사회참여 도와주세요

“가장 안타까운 건 비장애인들과 의사소통이 전혀 이뤄지지 않다보니 오해에서 비롯되는 갈등이 많다는 거예요. 농아들은 가족들 사이에서도 소외받고 있는 존재예요. 농아며느리를 얻은 어느 집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시어머니가 ‘저것은 맨날 화만내고 물건들을 집어 던진다’는 거예요. 의사소통이 안되다보니 쌓이고 쌓인 응어리들이 폭력으로 나타난 거죠. 집안에 멀쩡한 가재도구가 하나도 없더라구요. 그렇기 때문에 수화는 농아뿐만이 아니라 비장애인들도 배워야 하는 언어입니다.”

그래서 이들 부부가 당진에 와 가장 먼저 한 활동이 농아들을 위한 수화교실이었고 지금 표씨가 센터에서 하는 일은 비장애인들을 위한 수화교실이다. 사회 어느 한 구석에라도 마음과 뜻이 전달되지 않아 고통을 당하는 이웃이 있어선 안된다는 신념은 경제적으로 아무리 힘들지라도 이들 부부가 지켜온 사명이었다. 수화를 배우겠다고 찾아온 농아가 한명도 없을 땐 이들 부부는 직접 농아의 집을 일일히 찾아가 수화교육을 했다. 그 노력들이 얼마만큼의 결실을 거두었는지 모르지만 유리벽안에 갇혀있는 농아들이 가족과, 세상과 대화할 수 있는 그날에 한발짝이라도 다가갔다면 그것으로 만족할 뿐이다.

장애우의 날 표창을 받으러 가는 표씨에게 이동전화 문자로  소감을 물었다.

“이렇게 큰 상을 제가 받아도 되는지 모르겠어요. 장애인들도 사회구성원의 한 사람으로 사회에 참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도움을 주시는 방법은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바꾸는 것, 그리고 수화를 배우는 것입니다. 여러분 수화를 배우세요. 장애인의 삶이 보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