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1960년대 초까지 북한보다 1인당 GNP가 적었고 1945년 해방직후에는 남한내에 발전시설이 부족해 북한의 수풍발전소에서 전력을 공급받아 서울의 불을 밝힐 정도로 낙후됐었다.
우리나라는 故박정희 대통령의 조국근대화, 새마을운동 등으로 농촌을 개혁하고 부흥시켜 1960년대 중반부터 북한의 GNP를 앞서기 시작했다. 또한 경제의 견인차 역할과 건설 현대화를 일으켰던 故정주영 현대그룹회장이 1000마리의 소를 몰고 북한을 방문했으며 금강산 관광을 시작하면서 북한 개방의 물꼬를 트기 시작하였다.
필리핀은 2차 세계대전 전에는 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잘 살았던 나라였는데 경제를 뒷전으로 하고 민주화만 부르짖다가 아시아에서 북한 다음으로 못사는 1인당 GNP 1000달러밖에 안 되는 극빈국가로 전락하고 말았다. 북한도 인구는 2300만명에 1인당 GNP가 220달러밖에 안 되는, 아시아에서 제일 못사는 나라로 전락한 지 오래다.
전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의 햇볕 정책으로 북한도 서서히 개방되고 있으며 개성공단에 39개 기업이 입주해 이 공단에서 1만1342명의 북한 노동자가 근로하고 있다. 개성공단은 현재도 계속 신축 중에 있다.
금강산 현대관광 타운에는 500여명의 조선족들이 고용되어 일하고 있다. 성수기시는 1일 3000여명이 금강산을 관광하고 있으며 특히 최성수기시에는 하루에 1만여명이 관광을 할 정도로 유명한 곳이 됐다.
필자가 개인적으로 몇 주전에 바로 이 금강산을 다녀왔다. 필자가 1970년대 초 최전선에서 본 북한과 북한군 병사들을 비교해보니 지금의 북한병사들이 약간 살이 더 붙어있고 부드러운 미소를 띄고 있었다. 금강산으로 가는 골목마다 북한군 병사가 보초를 서고 있으며 아직도 5호담당제와 군인들이 교통신호 역할을 하고 있었다. 북한은 현재 110만 대군을 유지하고 있으며 18세에 입대해 10년간 의무복무한다.
또한 주민들이 사는 동네의 산에는 나무 한 그루 없으며 저녁에는 아궁이에서 나무로 밥을 짓고 굴뚝에서 연기가 나며 저녁 후에는 집집마다 불이 꺼져 암흑세계와 같았다.
북한은 태풍, 폭우등 수해로 내금강산의 관광이 통제되고 북한 주민들의 사는 집은 무너지고 제방은 무너져 복구 중에 있었다. 북한마을의 주민들의 집은 색깔, 크기, 모형은 똑같고 우리나라 60년대의 집 구조 형태이다. 또한 금강산 바위마다 김형직, 김일성, 김정일 일가의 찬양비와 주체사상을 선동하는 글이 쓰여 있었다.
북한 주민들의 식생활을 위해 슈퍼옥수수, 밤나무 4만 그루를 심어 동포애와 민족애를 심어주고 있었다.
금강생수는 우리나라의 태창기업과 북한측의 합작으로 금강산 생수물공장을 지어 관광객에게 생수를 공급해주고 있었다.
금강산 관광객 중 북측세관을 통과시 신고서용지와 질문시 한 글자만 틀려도 100달러 이상 벌금을 물어야 한다. 북한 주민의 주 이동수단은 도보 및 자전거였다. 북한은 남한과 같이 황해남도, 황해북도, 자강도, 양강도, 함경남도, 함경북도, 평안남도, 평안북도 8개도로 구성되어 있다.
금강산 곳곳에 ‘위대한 수령 김정일 동지만세’, ‘영광스러운 조선노동당만세’라는 문구를 바위에 새기고 설치해 놓았다.
금강산으로 가는 길은 육로로 우리나라 부산에서 출발하여 강원도 고성군을 경유 금강산을 잇는 7번국도가 있으며 동해철도는 1937년 강릉에서 출발하여 원산을 잇는 철길이 있으며 앞으로는 시베리아, 유럽을 이어 관광 경제 수송 철도 역할이 가능할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남북정상회담이 지난2일부터 4일까지 열렸으며 우리군 출신의 김낙성 의원이 특사자격으로 남북정상회담에 동참해 당진군민의 위상을 드높여 주었다. 필자도 35년간 군 생활을 하고 있지만 앞으로 북한과 이념, 사상과 제도를 과감히 해소하면 머지않아 통일도 가능하다고 판단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