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종일 짖던 개도 고이 잠든 야심한 밤. 자는 줄 알았던 두꺼운 솜이불이 스르르 열리며 부스스한 머리의 소녀들이 하나둘씩 잠을 깨 일어나기 시작한다. 평생 정조관념 하나로 살아온 고리타분한 울 엄마와 아빠는 세상모르고 잠이 들었다. 잠옷 차림의 소녀는 살금살금 숨을 죽여 책상 앞에 앉자마자 노트북을 꺼내 그녀들만의 사이버 공간으로 접속한다.

비밀 종교집단의 집회에 참석하기라도 하는 것일까. 비밀결사를 지키려는 결연한 의지보다는 마치 재미난 놀이동산과 같은 환상의 세계로 들어가는 호기심이 그녀들의 얼굴에서 촉촉이 빛나고 있다. 과연 저 사이버 공간에는 어떤 총천연색 재미거리가 있기에 소녀들이 졸린 눈을 부비며 매일 밤 강력한 중독증세를 보이게 되는 것일까.

사이버 커뮤니티 '언니네'는 여성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고백함으로써 스스로 치유될 수 있는 처방전을 얻어가는 살아 숨쉬는 공간이다. 이 책은 언니네 회원들이 '자기만의 방'에 올린 글 중 지난 5년간 가장 많은 추천을 받은 글을 엮었다.

부모가 학교간 사이에 몰래 훔쳐보고 킬킬댈까 두려워 자신의 일기장에도 함부로 적지 못하는 적나라한 에피소드들을 써낼 수 있는 힘은 바로 인터넷이라는 '익명성'이 철저하게 보장된 공간만이 가지는 ‘특’장 점에서 기인한다. 마치 남이야기하듯 덤덤하게 또는 치열하게 글을 쓰면서 소녀들은 강한 카타르시스에 도취된다.

여성들만이 머무는 폐쇄적인 공간에 대해 세상이 가지는 반발심리는 어마어마하다. 여성가족부는 세상의 언어를 빌리자면 아름다운 유교사회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호주제 등의 미덕을 깨뜨린 악의 온상이다.

저출산율을 걱정하면서 여성가족부가 주관하고 있는 보육사업은 남성을 차별하는 여성 우대 정책이라 욕하는 사회, 결혼한 여성들의 사회참여율이 다른 나라에 비해 현저히 떨어지는 것을 ‘우리나라 여자들은 애 낳고 키워야 하기 때문’이라며 정당화하는 사회.

그러나 ‘언니네’가 단순하게 여성들만이 공유하는 밀폐되고 고립된 공간만으로 존재했다면 그 에너지는 크게 훼손되었으리라. 비밀스러울수록 오히려 남성들에게 공개함으로써 자연스러운 대화와 이해의 공간으로 승화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이 남성독자들에게 주는 메시지는 의미심장하다. 할 말은 깊숙한 곳에 숨겨놓은 채 평행선만을 걷는 것보다는 다소 티격태격하게 되더라도 교차점을 찾아가는 것이 더 건설적이기 때문이 아닐까.

여자들의 이야기, 섹스앤시티나,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 처럼 외국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 여자들의 이야기.

용감한 그녀들이 폭로하는 삶에 관한 가장 깊은 진실에는 나를 돌아보게 하는 마력이 있다. 똑같지는 않지만 다르지도 않은, 나와 당신과 그녀들의 이야기. 그 진실을 마주하면서 ‘나 혼자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따뜻한 위안과 용기, 삶에 대한 강한 애착을 얻을 수 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나를 만나는 곳, 마음껏 웃고, 울고, 소리치는 곳, 내가 혼자가 아닌 그 곳이 바로 ‘언니네 방’이다.

내가 혼자가 아닌 그 곳 - 언니네 방

지은이 언니네 사람들 | 출판사 갤리온 | 가격 98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