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이 기쁨보다 나을 때

박용완

탑동감리교회 담임목사

슬픔과 기쁨, 초상집과 잔치집, 고난과 형통. 둘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우리는 어느 곳으로 먼저 손이 갈까. 고난이나 슬픔을 일부러 선택할 사람이야 없겠지만 어차피 삶 가운데에 만날 수밖에 없는 일들이라면 우리의 자세가 어떠할 것인가. 솔로몬은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함으로 마음이 좋게 되느니라”고 금언을 말한다. 근심함으로 마음이 좋게 된다는 말은 ‘영혼을 맑게 한다’는 의미이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인생길에 자신을 연마하는데 크게 도움이 되는 고통이나 슬픔이 있다는 말이다. 그 당장에는 도저히 고난이나 슬픔을 견딜 수 없을 듯 하지만 이윽고 그 어느날에 영혼의 성장에 크게 유익하게 되는 경험이 우리에게는 크든 작든 가지고 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그의 애가서에서 “젊은 시절에 이런 멍에를 짊어지는 것이 좋다”라며 고난에 대한 또 다른 가치를 설명한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이 속담 뿐이겠는가. 역경으로 인간적인 훈훈함을 지닐 수 있게 된다는 보다 소망적인 격려가 아니겠는가.

예수께서도 평지에서 전한 복음 중에서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눅 6:21)”라고 말씀하신다. 우는 것이 분명 행복은 아닐진대 도대체 무엇을 말씀하시려는 것인가.

어느날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지나가시는데 한 장례행렬을 만나게 돼셨다. 그 고을에 사는 한 과부의 외동아들이 죽어서 무덤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자식을 잃은 어머니는 가슴 찢어지는 슬픔으로 탄식하며 장례행렬을 따르다가 예수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때 예수께서 “울지말라”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보면 예수께서는 우리가 울거나 가슴 아파 슬퍼하는 것을 긍정하시는 분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런 후 그 외아들을 다시 살리시므로 과부는 주 예수가 어떤 분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슬픔의 순간에서 최상의 위로를 얻는 복된 어머니가 되었다.

만약 그녀가 그러한 슬픔 속에서 애통해 하지 않았더라면 진정으로 예수를 뵈올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슬퍼하는 사람, 가난한 사람을 찾아오신 분이다. 그가 친히 그런 사람들을 찾아 오셨기 때문에 울고 있는 사람, 슬퍼하는 사람이 복이 있는 것이 아닐까.

슬퍼 애통했기 때문에 위로자이신 예수를 만났다면 얼굴에 근심함이 영혼을 맑게 한다는 진리는 얼마든지 긍정적이다.

우리를 슬프게 하는 일들은 예정되어진 일들이 아니다. 그러기에 만나기를 꺼리며 모두 회피하고 싶은 것이 고난이요, 슬픈 일들이다. 그럼에도 불가피하게 만날 수밖에 없는 심술꾼들이다. 슬픔을 슬픔 자체로만 받아들인다면 당해낼 장사가 어디 있을까. 그러나 그 일 때문에 예수를 만나고, 만남의 신비로운 기적이 있기에 당신은 울고 있을지라도 행복한 사람이다. 그리고 문을 열어야 한다. 거기에 당신을 위로하고자 예수께서 서 계시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