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에게 필요 이상의 부를 추구하는 일이 자연스럽지 못한 것이라고 판단했던 아리스토텔레스, ‘부’는 착복한 재산이라고 주장했던 19세기 사회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들, 소비자 제일주의를 저주하고 자발적인 소박함을 권고하는 오늘날의 많은 환경원리주의자들에 이르기까지 ‘부(富)’라는 이름에는 악명이 따라붙어 왔다.

중요한 것은 누가 ‘부’를 가졌고 누가 갖지 못했는가, 그리고 ‘부’가 어떤 목적으로 사용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어떤 형태의 ‘부’는 보편적으로 선한 것으로 여겨진다. 건강, 사랑과 강한 유대감으로 결합된 가족, 서로에 대한 존중과 같은 것이 그렇다. 경제학자들의 계산에는 쉽게 포함되지 않겠지만 이런 항목이 ‘부’라는 데에 이견은 없다.

그러나 일상적으로 ‘부’란 용어는 협의로 해석되어 금융자산만을 의미하는 것이 일반적이고, 그에 따라 과욕 등의 좋지 않은 뜻을 갖게 되었다. ‘부’는 어떤 이에게는 자신의 주관적인 필요 수준보다 더 많이 소유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아무리 많아도 충분하지 않은 사람도 있다. 상대적으로 가난한 이들에게 ‘부’의 의미는 덜 주관적이다. 굶주린 아이가 있는 엄마에게 하루하루 한 줌의 쌀은 무한한 가치를 지닌 ‘부’일 수 있다. 따라서 ‘부’가 어떤 의미이건 적어도 여기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부’는 단순히 ‘고급 승용차 2대를 소유했다’는 식의 의미가 아니다.

‘부’와 돈은 동의어가 아니다. 잘못된 인식이 만연되어 있기는 하지만 돈은 여러 가지 ‘부’의 증거 혹은 상징적인 표현 중 하나에 불과하다. 때때로 ‘부’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을 살 수 있다. 따라서 누구든 ‘부’의 미래를 가장 포괄적으로 이해하려면 그 근원인 욕망을 이해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욕망이란 절대적인 필요에서 일시적인 욕구까지 모든 경우를 의미할 수 있다. 어떤 경우이건 부란 갈망을 만족시키는 그 무엇을 의미한다. ‘부’는 참을 수 없는 갈망을 해소해 준다. 한 번에 한 가지 이상의 욕망을 만족시킬 수도 있다. 예를 들어 거실 벽을 아름답게 치장하고 싶을 때, 그곳에 걸린 그림 한 점은 비싸지 않은 모조품일지언정 잠시 멈춰 서서 바라 볼때마다 작은 기쁨을 준다. 그와 동시에 나의 고상함이나 사회적 품격을 손님에게 인상깊게 심어 주고 싶은 욕망을 충족시킬 수도 있다.

사실 ‘부’를 대략적으로 정의해 보면 그 형태가 공유든 아니든 일종의 소유다. 경제학자들은 이를 효용(utility)이라 부른다. 즉, ‘부’는 우리에게 어떤 형태의 웰빙을 제공하거나 다른 형태의 ‘부’로 교환할 수 있게 만든다. 물론 어떤 경우에건 ‘부’는 욕망의 소산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에 관한 생각 자체를 혐오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도 하는 것이다.

일부 종교에서는 욕망에 오명을 씌운다. 금욕적인 믿음은 ‘많이 바라지 말라’, ‘최소한의 것으로 살아라’라고 설파하며 가난을 인내하고, 욕망을 채우려 하기보다 줄임으로써 행복을 추구하라고 전한다. 오랜 세월 동안 인도가 바로 그렇게 살아왔다.

이에 비하여 프로테스탄트 윤리는 오히려 정반대의 메시지를 전파했다. 물질적인 욕망을 억누르는 대신 ‘열심히 일할 것’, ‘검약할 것’, ‘정직할 것’이라는 윤리를 설파했다. 그리고 이를 지키면 하나님이 욕망을 채우도록 도와주실 것이라고 약속했다. 서양에서는 대부분 이 가치관을 받아들여 ‘부’를 키웠다.

1970년대 중국의 지도자 덩샤오핑(鄧小平)은 부자가 되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역설했다. 그의 말은 세계 인구 5분의 1에 달하는 중국인의 가슴 속에 억제되어 있던 욕망을 자극하여 오랫동안 지속되었던 가난으로부터 중국을 해방시켰다.

모든 사회의 지도층은 금욕주의와 이데올로기, 종교 기타 다른 수단을 통해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사회 전반의 욕망을 관리해 왔으며, 그것이 바로 부 창출의 출발점이었다.

단순하게 욕망을 자극하거나 탐욕을 찬양한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꼭 부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욕망을 선동하고 ‘부’를 추구하는 문화가 필연적으로 ‘부’를 창출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가난의 미덕을 강조하는 문화에서는 그들이 추구하는 가치대로 머물 수밖에 없다.

복지를 책임지는 오늘날의 나라형태에서는 ‘부’의 소유욕이 큰 메리트로 작용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행복한 가정과 나의 최소한의 욕망을 채우고자 할 때에는 ‘부’는 필수조건이다. 그래서 모두가 잘 사는 나라, 모두가 행복한 나라를 꿈꿔본다. 그것의 출발점은 개개인과 좀 더 크게는 가정이 평화롭고 행복해야만 한다.

무자년 새해, 모두 부자가 되는 당진군민의 그림을 그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