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 밟으며 산다는 게 얼마나 좋은 건지 알아? 찬거리라도 한번 사러 나갔다오면 하루해가 다 저물지만 마을 사람들과 오순도순 사는 재미가 그만이지. 서울 같은 대도시에서는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지. 가끔 마주치더라도 인사도 잘 안해. 세상 얼마나 살다 간다고 그렇게 삭막하게 사는 지. 기자 아가씨는 그렇게 살지마, 알았지? 행복하게 사는 건 별거 아니야...”
갈매기에게 과자 던지는 일에 한참 재미를 붙일 무렵, 뱃고동이 울렸다. 도비도 선착장에서 배에 오른 지 10분만이었다. 여름을 맞아 부쩍 파랗게 물든 바닷길을 달려 도착한 소난지도에는 낯선 방문객을 반갑게 맞아 주는 섬마을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세곡 실은 선박이 가득했던 옛 포구
배에서 내리면 바로 보이는 마을이 갑진마을이다. 옛날 갑진마을에는 세곡을 가득실고 한양으로 향하던 뱃사람들로 북적됐었다. 마을 산에서 당제를 지낼 때면 행여 부정이라도 탈까 산에는 오르지도 못했다고 한다. 일주일동안 굿판이 이어지는 날이 비일비재했다고.
소난지도 터줏대감인 최한용(75) 씨는 어릴 적 섬 풍경을 떠올렸다.
“세곡을 실은 운반선 수십척이 섬 앞바다에 가득했었지. 배가 정박하기 좋은 지형 때문에 바다에 바람이 거세게 불 때면 이 섬에 닻을 내리고 쉬어가곤 했어.”
곡식을 가득 실은 풍선들이 빼곡히 들어찼던 섬마을 포구에는 이제 하루에 대여섯 차례 섬과 육지를 오가는 여객선이 잠시 정박할 뿐이다. 최씨는 그때만해도 네땅 내땅 할 것 없이 마을 사람들이 한데 어울려 살았다고 했다. 200호가 넘는 집이 야트막한 돌담을 사이에 두고 한 집처럼 살았다고. 세월이 흐르면서 이웃들이 하나둘 육지로 떠나고 운명을 달리해 원주민이라 할 수 있는 섬 토박이는 얼마 남지 않았다. 현재 소난지도에는 45가구가 살고 있으며 이중 고향이 소난지도인 사람은 가구는 8가구뿐이다.
배타고 육지로 학교 가는 섬 아이들
마을에는 이제 갓 돌이 지난 (염)성균이를 포함해 전부 8명의 아이들이 바다와 함께 자라고 있다. 마을 어귀 교회 앞을 지날 때 아이들의 서툰 피아노 소리가 발길을 잡았다. 피아노가 있는 교회는 아이들에게 놀이터였다. 아홉 살난 (차)은지와 (김)민하는 한살 어린 동생 (염)혜원이와 나란히 피아노 앞에 앉아 노래 연습이 한창이다. 카메라를 들이대자 서로 피아노를 치겠다며 아이들이 동시에 띵동띵동 건반을 누른다. 5년 전에 섬마을에 부임해 온 염병돈(39) 목사는 “교회가 아이들에게는 놀이터도 되고 공부방도 된다”며 “자연 속에서 마음껏 뛰어 놀 수 있기 때문에 정서 발달에 좋은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말했다.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유치원에 가는 (염)태균이까지 모두 6명이다. 아이들은 모두 아침 7시30분 첫배를 타고 육지로 나가 오후 5시30분 배를 타고 섬으로 돌아온다. 도비도 선착장에서 학원 버스가 아이들을 삼봉초등학교까지 데려다 준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학원 버스가 다니지 않아 엄마들이 아이들 손을 잡고 학교에 데리고 다녔다. 아이들이 수업을 마칠 동안 엄마들은 학교 주변에서 아이들을 기다렸다. 박상미씨는 “아직 아이들이 어려서 자연에서 사는 것이 훗날 좋은 추억이 되겠지만 아무래도 중학교에 들어가게 될 때를 생각하면 걱정이 된다”고 말했다.
소난지도에도 20여년 전에는 학교가 있었다. 1960년 삼봉초 소난지 분교장이 개장했으나 섬인구가 점차 줄어들고 학생수가 줄면서 1992년 폐장됐다. 지금은 폐교를 활용해 마을회관이 들어설 예정이다. 최한용 씨는 “섬마을 최대의 숙원 사업은 아이들의 교육문제가 해결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섬사람들이 섬에 사는 이유
섬마을에서는 평상에 앉아 바지락을 까는 아낙들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이곳 아낙들은 대부분 물때에 맞춰 양식장으로 바지락을 캐러 나간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서너 시간씩 갯벌에 쪼그리고 앉아 바지락을 캔다. 일요일에는 사람도 쉬고 바다도 쉰다. 필요한 만큼만 가져가고 욕심 부리지 않는다. 15살에 가족들과 섬에 들어와 22살이 되던 해에 섬사람과 결혼해서 80평생을 섬을 지키고 살아왔다는 할머니는 처마밑에 앉아 바지락을 까고 있었다.
“평생을 굴 따고 조개 캐서 먹고 살았지. 그렇게 삼남매를 길러냈어. 지금은 모두 장정이 돼서 서울에 살아. 어릴 적에 함께 살던 여동생들은 일찌감치 섬을 떠났지. 그래도 난 여기가 좋아. 서울에서는 답답해서 못살아. 평생을 살았는데 이제 와서 어딜 가. 그냥 여기서 건강하게 살다 가면 그만이지.” 당진장으로 김치담을 야채를 사러 다녀온다는 김영숙(78)씨도 23년 전 섬마을에 놀러왔다가 섬에 반해 아예 이사를 왔다.
“땅 밟으며 산다는 게 얼마나 좋은 건지 알아? 찬거리라도 한번 사러 나갔다오면 하루해가 다 저물지만 마을 사람들과 오순도순 사는 재미가 그만이지. 서울 같은 대도시에서는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지. 가끔 마주치더라도 인사도 잘 안해. 세상 얼마나 살다 간다고 그렇게 삭막하게 사는 지. 기자 아가씨는 그렇게 살지마, 알았지? 행복하게 사는 건 별거 아니야...”
<섬에서 만난 사람들>
어릴 적 친구들과 노인대학에 다니는 재미
김희석(74)씨가 고향으로 다시 돌아 온지도 벌써 14년이 흘렀다. 젊은 시절 아이들의 교육을 핑계 삼아 섬을 떠났었다. 젊은 혈기에 더 넓은 세상에 나가고 싶었다. 소금 600가마를 실을 수 있었던 운반선을 팔고 받은 당시 돈 12만원을 들고 육남매와 인천으로 떠났다. 아무런 연고지도 바닷일 말고는 할 줄 아는 것도 없었던 그에게 육지 생활은 참 고됐다. 셋방살이를 하며 안 해본 일이 없다. 그렇게 육남매를 키웠다. 아이들을 다 가르쳐 놓고 나니 어머님이 계신 고향이 그리워 졌고 그는 망설임 없이 다시 섬으로 돌어왔다. 그는 큰 아들을 제대로 못 가르친 것이 한이 될 뿐, 바다를 떠났다 다시 돌아온 것에 후회가 없다고 했다. 김씨는 요즘 섬마을에 살고 있는 어릴 적 친구들과 수요일마다 배를 타고 석문농협에서 열리는 노인대학에 나간다.
“재미나지, 어릴 적 친구들과 다시 학교에 다니니까. 요새는 노인대학 때문에 육지에 나가는 게 일주일 중 가장 큰 일이야.”
“물고기 잡을 수 있는 섬마을이 좋아요”
교육을 걱정하는 어른들과 달리 아이들에게 섬마을은 온통 놀이터같은 신나는 곳이었다. 육지에 사는 친구들이 부럽지 않냐는 질문이 무색할 만큼 아이들은 왜 부러워야 하는 건지 어리둥절한 표정이다.
“물고기도 잡을 수 있고 바지락도 잡을 수 있어서 좋아요. 친구들이랑 하루 종일 바다에서 노는 것도 재미있어요.” 혜원이와 민하가 피아노를 치다 말고 또박또박 말한다. 혜원이의 꿈은 어린이집 선생님이 되는 거고 민하는 피아노 선생님이 되는 거다. 은지는 나중에 커서 변호사가 되고 싶지만 아직 이유는 잘 모르겠다.
섬에 세월 낚으러 온 낚시꾼
육지로 돌아가는 배 위에서 낚시를 하러 온 김철순(42, 인천)씨를 만났다. 아침에 섬에 들어와 하루종일 낚시를 하다 돌아간다는 김씨는 우럭도 잡고 놀래미도 잡았었는데 어망 관리를 못해 모두 놓치고 말았다며 소라와 고동만 가지고 돌아간다고 했다.
그는 소난지도에는 처음 와 봤는데 인천 바다보다 깨끗하고 공기도 맑아 기분 좋게 하루를 보내다 돌아간다고 했다. 주말마다 낚시를 하러 다닌다는 김씨는 “기름유출 사고 때문에 걱정했었는데 바다가 너무 맑고 깨끗해 낚시하기에 아주 좋았다”며 “하루 종일 바다를 보며 이런 저런 생각도 하고 스트레스도 풀다 간다”고 말했다.
행복한 노후를 보내기 위해
소난지도 동쪽 끝 둠바벌 바닷가에서 최란우(70)씨와 김말자(62)씨가 바지락을 캐고 있다. 김씨는 오산에 살다 3년 전에 섬으로 들어와 민박집을 운영하고 있고 최씨는 10년 전에 섬마을에 놀러왔다 섬에 반해 이사를 왔다. 처음엔 교통도 불편하고 도시에 살던 습관이 남아 섬마을 생활이 힘들었지만 이제는 두 사람 모두, 섬사람이 다 되었다. 생전 잡아보지 못했던 호미를 들고 바지락을 캐는 일도 이젠 제법 능숙하다.
두 사람은 “인심 좋고 공기 맑은 섬에서 노년을 보내는 것만큼 평화롭고 행복한 노후는 없다”며 “마을사람이 함께 모여 감자도 삶아 먹으며 한 식구같이 살고 있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