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신화에 ‘크리티’ 라는 물의 요정이 있었는데 그녀는 아름답고 생기가 있어 모든 물고기와 나무 요정들의 사랑을 받았다. 크리티는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강가에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는데 파아란 하늘에 한 가닥 금빛이 흐르는 것이 있었다. 바로 태양의 신 아폴론이 지나가고 있었다. 아폴론은 매일같이 동쪽하늘에서 서쪽하늘로 황금마차를 몰고 다녔는데 그것은 바로 태양을 뜨고 지게 하는 것이었다. 크리티는 아폴론의 모습을 본 순간, 한눈에 반해버렸고 다음 날부터 계속 하늘을 쳐다보면서 아폴론에게 얘기했다. 하지만 작고 떨리는 크리티의 목소리는 아폴론에게 들리지 않았고 황금마차는 언제나 처럼 하늘을 가로 질러 사라졌다. 그렇게 9일 동안이나 한 곳에 서 있었던 크리티는 아주 앙상하게 말라 버렸고, 그 아름답던 목소리도 쉬어 버렸다. 그리고 마침내 다리는 뿌리로 변해서 땅 속 깊이 박혀버렸다. 크리티의 몸은 녹색줄기가 되었고, 귀여운 얼굴은 커다란 꽃으로 변했다. 아폴론을 사랑했던 크리티는 태양을 닮은 해바라기가 된 것 이다. 그 후로 해바라기는 여전히 동쪽에서 서쪽으로 태양을 쫓으며 옛날 일을 잊지 못하고 있다.

처서가 지나 아침저녁으로 제법 서늘해진 늦여름. 푸른 하늘과 뭉게구름을 배경으로 늘어선 해바라기의 모습에서 가을을 느끼기엔 아직 이른감이 있지만 해바라기를 볼 때마다 그리스 신화에서 읽은 크리티의 사랑을 떠올린다. 도대체 그 사랑이 얼마나 뜨겁고 강했기에 다리가 땅속에 박히는 것조차도 몰랐을까? 이렇게 아름답고 고귀한 사랑을 간직한 해바라기가 더러는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지나치게 권력을 지향하고 줄서기와 맹목적인 충성을 맹세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해바라기에 비유한다. 자신의 철학과 성향, 정체성을 잃어버린 채 힘 있는 자를 추종하고 양지만을 기웃거리는 몰지각한 일부 정치인이나, 사회의 각 분야에서 권력에 순종하고, 이를 통하여 이익을 챙기거나 호가호위하는 사람들을 이른바 ‘현대판 해바라기’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최근에 특히 해바라기들이 한창 기승을 부리고 있다. 바뀐 정권에 기대어 꼬리를 흔들어대며 권력자의 의중에 따라 횡포에 가까울 정도로 무리하게 업무를 수행하는 국가기관이나, 한껏 찬양의 목소리를 높이는 보수언론들은 마치 돌아가신 부모가 다시 살아난 듯 기세가 등등하다. 국가기관들은 그들에게 부여된 고유권한과 함께 국민을 보호하고 민주주의를 발전시킬 의무가 있다는 것을 잊은 듯하다. 그들은 오로지 권력의 매력과 달콤함에 반해 크리티가 아폴론을 응시하듯이 한곳만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현대판 해바라기들은 순수하고 열정적인 사랑으로 해바라기 꽃이 된 크리티와는 전혀 다른, 추악하고 비겁한 권력추종자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비단 권력을 추종하고 맹목적인 충성을 다하는 일부 국가기관이나, 보수언론 뿐만 아니라 나 자신과 주변의 사람들은 해바라기가 된 물의 요정 크리티를 욕되게 하지는 않고 있는지 돌이켜 볼일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