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군 의병 임정규는 나의 할아버지
석문면 장고항3리 임 동 순 씨
뒷세대가 갈 물길을 열었던 사람들
역사의 강을 흐르는 것은 물이 아니라 사람이다. 그것은 순리대로 흐르는 때가 있는가 하면 큰 흐름을 역류해 그동안 쌓아온 많은 것을 삼켜버리며 사람을 파괴한다.
그러나 그 앞에서 흐름을 거스르는 힘에 항거하는 사람들이 있어 우리는 그들을 의사, 열사, 의인들이라 부른다. 그들에 의해 역사는 진실을 드러내고 여기에 양심이 가세하면서 흐름은 본류를 찾으며 다시 나아가게 된다. 그래서 의인들의 삶과 죽음은 그들 개인의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것이다.
오늘도 쉼없이 흘러가는 역사의 강물에서 그들은 사라진 게 아니다. 우리 뒷세대가 갈 물길을 열기 위해 목숨을 아까와하지 않았던 그들의 흔적은 거대한 물줄기 위에 저만치 앞에 가고 있다. 그들의 삶과 죽음을 강변에 두고와선 안된다. 응당 두어야 할 곳에 그들의 삶의 위치를 두고 우리는 그들의 앞선 노고에 감사해야 한다.
석문면 장고항3리. 청솔파크 옆으로 난 농로를 따라가자 나무 우거진 숲길이 나타난다. 산사(山寺)에 가는 길처럼 호젓한 그 길로 접어들어 맨 끝집에 임동순(66세)씨 내외가 살고 있다. 이 집은 동학군 의병활동을 했던 임정규 선생의 아들, 그러니까 임동순씨의 아버지가 일경(日警)의 눈을 피해 숨어들어가 살기 시작한 집이다.
임씨의 선친 임종구씨는 여섯살 되던 해에 부친 임정규 선생의 참혹한 죽음을 목격한 뒤 이 집안의 씨를 말리겠다고 덤비는 일경을 가까스로 피해 있다가 대호지면 송전리를 떠나 이곳 석문으로 왔다.
임동순씨는 할어버지 임정규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귀가 닳도록 들으며 자랐다.
임정규(1865~1908)의 호는 치명이며, 본관은 나주, 신평이씨인 어머니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곳은 고대면 옥현리. 어려서 학문에 힘썼으나 당시 고대면 토호세력들에 선산을 강제로 수탈당하자 20세가 되던 때쯤 대호지면 송전리(당시 해미군 서면 송천리)로 이주하였다.
치명은 조선말기 사회의 부정부패와 타락에 염증을 느끼고 동학에 입교한 후 기울어가는 국운을 안타깝게 여겼다. 의협심이 강하고 힘 또한 장사여서 호랑이 장사라 칭하였을 정도였던 그는 마을에 일이 있을 때마다 중심이 되어 해결했다. 항상 말을 타고 석문면과 고대면 사이를 왕래하며 의기가 상통하는 인사들과 교분을 나누는 한편 대세를 관망하였다.
치명의 나이 스물아홉되던 해 갑오동학혁명(1894년)이 일어나 민란이 전국으로 퍼져나가자 치명은 서산에서 기병한 박인호(박도일이라고도 함)의 휘하에 들어가 의병활동을 하였다.
1905년 일제에 의하여 을사보호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치명은 그 울분을 못참고 경기도 지역으로 올라갔다. 그곳에서 의병활동에 가담, 항일투쟁을 하다가 일제의 초토화작전에 쫓겨 서해안 도서지방으로 피신하였는데 그후에도 국화도, 풍도, 난지도 등을 거점으로 의병활동에 가담하였다.
이때 일제는 치명의 본가를 찾아가 처 김씨를 위협, 집안에 큰 우환이 있으니 돌아오라는 거짓 전갈을 보내도록 했다. 집으로 돌아온 치명은 속임수임을 알고 바로 돌아섰다. 그러나 여섯살 난 외아들 장성의 발이 맨발임을 보고는 차마 그냥 갈 수 없어 치명은 잠깐 아들 신발이나 삼아주고 간다고 근처 삼밭에 숨어 신을 삼았다. 그러나 김승찰의 밀고로 일경에 포위된 그는 맨손으로 여러명에 대항하다 체포되고 만다. 치명은 세내바지 냇가에서 남성의 고환을 발라내는 잔인한 고문을 받고 실신, 그 자리에서 총살당하였다.
일경이 치명의 아들까지 죽여 종자를 없애겠다고 달려들자 이웃 민두훈이라는 사람이 아들 장성을 그의 집 장독대에 시루로 덮어 살려주었다. 이때가 1908년 음력 5월8일. 치명의 나이 43세 되던 해였다.
(이상은 임동순씨의 증언임 " 박상건 선생의 좥당진지역 독립운동사좦, 향토문화연구소의 '내포문화3', '당진향교지'에도 수록되어있음)
돌아가던 길 송전리 삼밭에서 여섯살 맨발아들 신발삼다 발각
세내바지 냇가에서 고환 발라내는 고문으로 실신·총살당해
안 가본 곳 없으나 재판기록, 유품 하나없어 관련기관 모두 외면
자손된 도리 못해... 육순 손자 소리없이 한맺힌 눈물만
할아버지가 그렇게 돌아가시고 3년 뒤에는 할머니까지 돌아가셔서 아홉살에 고아가 된 아버지는 어린 나이에 갖은 고생을 다하셨죠. 남의 집 머슴살이부터 해서...”
그 때문인지 아버지는 자녀를 8남매나 두셨다. 아버지는 해마다 대호지면 송전리에 있는 할아버지 선영에 참배를 하러 갔는데 임동순씨는 어려서부터 그곳까지 걸어다녔던 기억이 난다.
선비같다고나 할까. 예순이 훌쩍 넘은 나이에도 꼿꼿한 자세와 집념·명석함이 엿보이는 임동순씨의 자세와 얼굴도 숨길 수가 없는 고통이 담겨있다.
“할아버지 유품요? 사실 할머니가 돌아가신 이유도 그 때문이었어요.”
일본경찰들은 치명을 총살한 뒤 증거수집을 위해 치명의 부인 김씨를 심하게 구타해 지붕 용마루에 숨겼던 조총 한자루와 의병비밀문서를 압수해갔다. 이때 매맞은 여독으로 할머니는 돌아가신 것이다. 임정규 선생의 유품이 전부 사라진 것은 물론이다. 유품만이 아니다. 재판 한번 받지 못하고 아무런 기록도 남기지 못한 채 현장에서 바로 사살된 그분의 흔적은 역사에서 복원할 길이 없다.
임동순씨는 서산경찰서와 홍성보훈지청, 부산 문서보관서를 찾아가보고 동학에 많은 관심을 보였던 역사연구가 이이화씨도 찾아가 보았다. 동아일보, 조선일보 같은 큰 신문사에도 찾아가 보았다.
“제가 해볼만한 것은 다 해봤어요. 하지만 결론은 똑같더라구요. 문헌상 증거기록이 하나라도 남아있지 않으면 소용없다는 거예요. 자손된 자로서 제가 너무 무능해서... 그냥 이렇게...”
소리없이 주루룩 흘러내리는 임동순씨의 눈물을 증거로 댈 수만 있다면.
임동순씨는 예의 깎듯하면서도 집념 하나로 살아온 터였다. 삼봉초교를 졸업하고 학비가 없어 농사 지을 때, 못배우는 게 너무 억울해 4년 늦게 김창하 선생을 졸라 중학을 입학할 때, 박승선군수 시절 장고항3리 이장을 맡으며 복지회관을 짓기 위해 수십번 군청을 드나들 때 그때마다 그의 집념은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그런 그도 흘러간 시간을 되돌려 보여줄 도리만은 없는 것이다.
임동순씨의 선친은 할아버지 일을 겪은 탓에 자녀들에게 종교와 정당, 사회적 책무를 갖지 말 것을 항상 충고했었다. 그러나 아버지 자신이 동네일 해결에 조정역할을 맡곤 했을 뿐 아니라 임동순씨 역시 종교와 이장책무를 갖고 있다. 의협심과 집념이 강한 집안내력이라고 밖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김태숙 부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