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농어촌 지역 남자의 40%가 외국 여성과 결혼했다. 이에따라 다문화 가정의 실질적 당사자인 이주여성들을 위한 정책과 다양한 단체가 지자체마다 만들어지고 있지만 아직까지 지역사회 일원 대다수가 편견과 잘못된 정보 속에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하고 있다. 이에 본지는 자신만의 방법으로 한국사회 일원이 된 이주여성을 만나 새로운 이웃과 지역사회 일원 간의 교류와 소통을 돕고자 한다. 또한 다문화 가정 이주 여성들의 실질적인 어려움이 무엇인지 알아보고 다양한 고민들을 해소하기 위한 도움이 된 제도나 단체에 대한 정보도 제공하고자 한다.

※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역신문발전기금으로 이뤄졌습니다.

(김)원희(7), 원정(6), 원선(2)을 키우는 딸 부자 김동근(43), 벌러르 촐롱씨(31)는 당진에 정착한 지 2년째인 다문화가정이다.

공주만 셋인 탓에 엄마 구두를 신고 돌아다니고, 장난감 화장대를 차지하려고 싸우는 연년생 원희와 원정이도 모자라 이제는 원선이도 가세를 했기 때문에 엄마의 하루는 짧다. 주부로서 엄마로서의 역할 이외에도 그녀는 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서 운영하는 한글 어학당은 물론 제과제빵 학원도 매일 다녀야 하고 컴퓨터 자격증 시험도 준비 해야 하기 때문에 남편의 퇴근보다 귀가가 늦을 때도 있다. 얼마 전에 제과제빵 시험에 응시 했다가 고배를 마셨기 때문에 다음 시험에는 합격을 하리라 더욱 욕심을 내고 있다.

8년 전 한국에 처음 왔을 당시에는 그녀는 단순히 집안일을 하며 남편이 퇴근하기만을 기다리는 생활을 해왔다고 했다. 답답함을 느낀 촐롱씨는 남편의 출근길을 따라 나서서 일하는 내내 함께 있을 정도지만 부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원희와 원정이를 연년생으로 출산 한 뒤 2번의 이사로 당진에 정착하게 되면서 새로운 일상을 찾을 수 있었다고 했다.

“한국에 시집와서 할 수 있는 일이 없더라고요. 집에서 혼자 있는 게 한국생활에 적응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래서 처음에는 무작정 남편 출근할 때 따라가서 하루 종일 같이 있다가 퇴근했어요. 집에 혼자 있는 게 싫어서 차라리 그렇게 밖에 나가는 게 낫겠더라고요. 몇 달 정도 지났을 때 첫째 아이를 임신하고 나니까 한국어를 빨리 배워야 겠다는 생각이 번뜩 들어 집에서 인터넷과 TV를 통해 한국어를 배웠어요.”

촐롱씨는 당시 이주 여성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공간이 전무했던 것은 물론 손쉽게 찾을 수 없어 독학으로 한국어를 배웠고 서툰 한국어를 아이들이 그대로 배우게 될까 싶어 아이가 말을 배우기 시작할 때부터 어린이집에 보냈다고 했다. 그리고 당진에 도착하자마자 찾은 곳이 당진어학당이었다.

“한국어 배울 수 있는 공간이 있는 것도 좋았지만 다양한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어서 배울 수 있는 게 많다보니까 신났어요. 원래 제가 그렇게 적극적인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지원과 혜택이 많으니까 하고 싶은 일을 하는데 거리낌이 없어졌어요. 사람 만나는 것도 재밌고 하고 싶은 일을 지원 받는 다는 게 기쁨인 것 같아요.”

남편 김동근 씨는 “아내가 성격이 본래 적극적이라서 뭐든지 열심히 하는 것을 좋아하다보니 어린 아이들보다 더 바빠요. 또 몽골 여성의 특징이 여러 방면에서 남편보다 더 많은 역할을 해내는 억척스러움이 우리 아내한테도 있는 것 같아요. 학원 시간이 아이들 어린이집 돌아오는 시간과 맞지 않을 때는 첫째가 둘째의 어린이집 통학차량이 도착하는 시간에 맞춰 엄마 대신 마중을 나가기도  해요. 일하는 저보다 더 바쁜 사람이죠.”

몽골 새댁의 한국이야기

동근씨가 아내에 대한 자랑과 넋두리를 풀어놓자 촐롱씨가 옆구리를 쿡쿡 찔러댄다. 그러고는 부끄러운듯 웃자 동근씨가 하던 이야기를 멈추기도 한다. 티격태격하다가도 촐롱씨 웃음 한번, 애교 한번에 동근씨의 마음도 누그러지는 것이 이부부가 사는 법이었다. 부부는 닮는다더니 동근씨와 촐롱씨가 많이 닮았다.

두 사람이 부부의 인연을 맺게 된 것은 동근씨가 몽골로 선교활동을 떠나 PC방 사업을 시작하게 되면서 부터다. 동근씨는 경제 상황 악화 등과 맞물리게 되면서 잠시 일을 쉬고 있던 차에 종교인 통일교를 전파하고자 몽골에 선교활동을 떠나게 됐다고 한다. 동근씨가 선교 봉사활동과 함께 PC방을 열게 됐고 촐롱씨와는 사장과 직원과의 관계로 만나게 됐다.

그렇게 둘은 12살의 나이차와 일찍 결혼하신 장인어른과 동근씨와의 10살나이차도 극복하고 부부의 연을 맺었다.

촐롱씨는 “몽골사람들에 비해 얼굴도 하얗고 어려보여서 처음에는 12살이나 차이나는 줄 몰랐죠. 그리고 평소 한국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어서 국제결혼을 생각하던 차에 남편을 만나 한국으로 오게됐어요.”

평소 국제결혼을 생각해 둔 촐롱씨가 한국에 금새 적응할 수 있었던 데에는 몽골도 대가족제도가 보편화 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댁에서의 첫 살림은 아무리 마음씨 좋은 시부모님과 함께라도 낯선 나라와 새로운 환경, 사람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이 따르지만 촐롱씨에게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고.

촐롱씨는 “몽골은 초원에 큰 텐트와 같은 집을 짓고 3대가 같이 사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래서 신혼살림을 시부모님댁에 들어가 차렸을 때도 큰 문제가 없었어요. 부모님에게서 한국생활을 배우고 분가해서 분가 이후에 혼자 생활을 할 때도 금방 적응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시댁 식구들과의 갈등보다 제가 가장 신경썼던 것은 정말 한국사람이 되는 거였어요. 몽골과 한국 사람들의 옷 입는 방식이나 화장법이 달라 나름대로의 연구가 필요했죠. 한국 사람들은 화장도 연하게 하고 옷도 화려하게 입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리고 눈썹도 연하게 그리고 하다보니 생활도 모습도 진짜 한국사람이 되더라고요.”

“‘이주여성’ 수식어 버리는 것이 가장 빨리 적응 할 수 있어요”

이런 촐롱씨의 모습을 지켜봐 온 동근씨는 이주여성의 남편으로서 할 수 있는 가장 큰 역할이자 도움은 아내를 이주여성이나 외국인으로서 인식하지 않는 것이라고.

가장 가까운 남편부터 이주여성이나 외국인으로서 편견을 가진다면 아내가 한국생활에서 큰 어려움을 겪을 때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서도 ‘나는 외국인’이라는 나약함을 보이기 쉽기 때문이라고 했다. 동근씨는 어린 아내와 아이들을 강하게 키워야 한다는 것이 신조다.

“남편이 문화적 차이를 가장 먼저 이해해 주는 것은 맞다고 생각해요. 저도 여러 나라에서 생활하면서 가장 먼저 이해해야 했던 게 언어와 문화인 것을 감안하면 낯선 나라에 시집와서 산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죠. 하지만 어느 정도 생활에 익숙해 지면 외국사람으로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언제까지 외국인일 수 없잖아요. 한국말도 잘 하고 국가의 구성원이 됐으면 스스로가 도움이나 보호의 대상이 되려는 나약함은 버려야 한다고 봐요.”

앞으로 부부의 소망은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라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 수 있는 바탕을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한다. 촐롱씨는 여느 엄마들처럼 아이들에게 다양한 교육기회를 마련해 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동근씨는 자유로운 공부를 강조해 티격거리기도 한다고.

촐롱씨는 “다른 아이들보다 뒤처지지 않을까 라는 걱정도 해요. 그래서 이것 저것도 해보고 싶은데 남편은 저와 정 반대에요. 아이들 공부뿐만 아니라 저도 열심히 해서 자격증도 많이 따고 제과제빵 기술을 빨리 익혀 몽골에서 빵집을 한번 내보는 것도 좋겠다 싶어요.”

동근씨는 “여유를 가지고 아이들에게 다양한 경험도 시켜주고 싶어요. 나중에는 아내의 고향인 몽골에 가서 지내고 싶은 마음도 크고요. 그러기 위해선 더 많은 준비가 필요할 테고 당진에서 얼른 자리를 잡아야 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