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가 산업화 정보화되어 가면서 인류는 엄청난 변화들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시각각으로 현대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져가고 철학자들은 이런 시대를 가리켜 나름대로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휙스터는 ‘혼란의 시대’라고 하고 소로킨은 ‘위기의 시대’라 했고 괴슬러는 ‘갈망의 시대’, 드러커는 ‘단절의 시대’, 갤브레이드는 ‘불확실성의 시대’라는 말로 정의 하였습니다. 분명한 것은 과학이 발전하고 시대가 빠른 속도로 변화되어 갈수록 비인간화 현상은 그만큼 더 골이 깊어진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물질 만능주의가 우리들의 가치관을 좀먹습니다. 인간조차도 상품으로 전락해 갑니다.
그에 따라 인간 존중 의식이 점점 약해져 가고 있습니다. 또 소외 현상은 더욱 심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살고 있긴 하지만 그곳에서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처럼 느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을 불행하고 절망에 빠지게 하는 것은 물질이 사라질 때도 명예나 권력을 빼앗겼을 때도 아닙니다. 아무도 나를 인정해 주지 않고 함께 해 주진 않았을 때 사람은 절망합니다. 철저하게 혼자일 때 헤어 나올 수 없는 절망에 빠지는 것입니다. 외로운데 함께해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고통 속에 던져져 있는데 돌보아주는 사람이 없음을 느끼며 절망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이 사회를 보면 겉으론 화려하고 풍성해 보이지만 우리들 속에 감추어진 고독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나를 찾아와 달라, 네게 말을 들어 달라는 것입니다. 무언의 절규를 하는 것입니다.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테레사 수녀가 호주에서 사역할 때 한 나이 많은 원주민 할아버지 집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흙으로 지어진집 구석구석이 온통 먼지투성이였습니다. 사람이 사는 곳이라고는 도저히 믿어 지지 않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혼자 사는 할아버지는 밤이 되었어도 불을 켤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테라사 수녀는 방을 청소하다가 초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 노인에게 물었습니다. “왜 초가 있는데도 불을 켜지 않습니까?” “아무도 나를 찾아와 주지 않기 때문에 초를 켤 필요가 없지요.”
아무 소망 없이 살아가는 이 할아버지, 죽을 날만 기다리며 산다는 노인에게 그녀는 약속을 했습니다. 자기가 매일 밤마다 찾아 올 테니 불을 밝혀 달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고 수녀는 인도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얼마 후 이 할아버지로부터 한 통의 편지가 날라 왔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은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비록 수녀님을 오지 않지만 자신은 매일 밤 초를 밝힌다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매일 자신을 찾아오고 계심을 이제야 알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자기백성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신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기 위함이라” 했습니다.
이렇듯 지금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소외된 사람들을 찾아가 그들과 함께하고 그들의 이웃으로 하나님의 정의와 공평이 넘치는 평화의 그날을 위해 사명으로 오늘을 살아가라고 명하시는 메시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