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원은 뛰어난 문인이지만 그의 진면모는 행정가의 자질에 있다. 박지원은 지방 군수와 말단 관원으로 10여년간 관직에 근무한 것이 벼슬의 전부였지만 그의 기록에 보이는 행정가로써의 능력은 실로 탁월(?)하다. 1799년 당진(면천)군수로 근무하며 박지원은 충청도 관찰사에게 다음과 같은 건의를 한다.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아전이나 면임(면장)에게 가가호호 방문한다 해도 정확한 실정을 파악할 수는 없습니다. 무슨 재주로 고민과 곡절을 파악해 바라는 바를 충족시켜줄 수 있단 말입니까. 어린 아기의 울음소리만 들어도 젖을 줄줄 아는 어미만이 그것이 가능합니다. 아기가 어미가 가슴만 쓰다듬어도 울음을 뚝 그치는 것은 먹여줄 것을 지니고 있는 탓입니다. 하여 (백성들은) 따뜻하게 쓰다듬고 다독거리는 것만이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겁니다.”

당시 충청도 지역은 가뭄과 흉년으로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백성들이 즐비했다. 박지원은 이런 시기의 목민관은 안팎으로 곱사등이 신세라 하면서 나라(國)도 구제하지 못하는 가난에 대한 심각한 고민을 한다. 박지원의 고민은 백성과 함께 숨쉬고 함께 생활하는 목민관만이 그 난제를 풀 수 있는 단초라는 생각을 한다. 박지원은 자신의 녹봉을 털어 백성들의 궁 휼에 나서면서도 그것은 임시방편에 불과한 것이고 해답은 아니라 말한다.

박지원은 국가의 행정력이 나라와 백성들간의 진정한 핏줄로 기능할 때만이 비로서 그것이 가능하다는 탁견을 내놓는다.

이것이 박지원의 뛰어남이다. 다산 정약용도 이런 발상(?)은 하지 못했다.

박지원은 당진(면천) 군수 생활을 하며 십여권의 책을 썼는데 ‘칠사고(七事考)’도 그중 하나다. 박지원의 거의 모든 저작물은 번역이 되어 세상에 공개 되었지만 칠사고는 아직 아니다. 발굴된 지 2년이 안 된 탓이다. 박지원은 자신의 기록에 당시 당진지역의 많은 정보를 채록하여 오늘에 전하고 있다. 지역의 역사와 향토풍물은 물론 토지와 백성의 생활양태 등 실로 향토사의 보고라 할 만한 기록들이 그의 저작 곳곳에 보인다.

박지원의 당진(면천) 군수시절 쓴 ‘칠사고’에 대한 논의가 시급하다고 본다. 언제일지 모를 학계의 논의를 기대하기에는 너무나 한가하다. 발굴자를 초청하여 ‘해제와 의미’를 듣고 나아가 수록 내용의 소개를 통해 언론과 지역의 관심유도가 필요하다고 본다. 동시에 당진 출신으로 구한말의 바둑 고수이자 바둑세계의 전설이 된 ‘백남규’에 대한 토의도 함께 되었으면 한다.

지방자치는 독특한 지역의 문화 콘텐츠의 발굴 육성의 시대라 할 수 있다. 없는 전설도 만들어내는 행태는 지양돼야 하겠지만 보물같은 문화자료를 보고도 외면 한다는 것은  무능하다 못한 맹아적 행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