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제역! 정말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천 년 전 까치집은 올해도 같은 집을 짓고 산다. 그러나 천 년 전 인간의 주택은 지금으로서는 문화재가 된다. 사람은 발전하고 변해가고 있는 것이다. 아니 성장하는 대열에서 뒤쳐지면 그만큼 뒤떨어지기 때문에 거기에 상응하는 대우를 받게 되어 있다.

인간에게만 인격이 있다. 그 인격에는 지, 정, 의가 있다. 그 중에 지적인 부분만 생각해 본다.

삼십년 전만 하더라도 농촌에 소 한 마리만 사육해도 농사짓는 일에 많은 도움을 받았다. 논을 갈려면 소와 함께 농부가 일을 했다. 밭을 갈아엎으려면 소는 쟁기를 끌고 사람은 쟁기를 잡고 밭을 갈았다. 말하자면 한반도에서는 넓은 땅은 아니었지만 소들이 농사하는 사람과 함께 농사를 지었다. 농사하기에는 힘이 들었겠지만 농부와 함께 소는 들로 논으로 밭으로 함께 다녔다. 소들이 사람과 같이 운동을 한 셈이다. 그러나 지금은 많은 생산을 목적으로 축산업을 하게 되었는데 좁은 공간에 집단으로 소나 돼지를 사육하게 되었다. 즉 어떻게 해야 동물을 많이 사육할 수 있는가 생각하게 되었다. 농촌의 경제가 약하기에 그러한 판단을 할 수 밖에 없었고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수입을 올릴 수 있는 가가 당위성으로 온 것이었다. 한마디로 돈을 목적하게 되어서 생명의 존엄성 보다 많은 생산이 목적적 가치가 되었다. 불과 한 달 전 만 하더러도 발굽이 갈라진 동물이 백만 마리가 살 처분 되었다는 보도와 그 사체들을 땅에 묻었다는 것이다. 걱정이 되었다. 소, 돼지가 도합 백만 마리나 땅속에 묻혔다니 그러면 우리가 마시는 지하수는 경계가 없는데 생수를 마셔야 할 텐데 생수가 오염되는 것을 어찌하면 좋다는 말인가. 지금은 땅 속에 묻힌 동물의 숫자가 엄청나다. 뉴스에 의하면 삼백만 마리가 넘는다고 한다. 우리네 식탁이 언제부터 이렇게 고기반찬을 즐기게 되었는지, 우리 몸이 비만해서 어떻게 해야 가벼운 몸을 유지하려는지, 육체가 건강하려면 체중이 과체중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전문가들은 계속해서 정보를 제공하느라 애쓰기도 한다.

자연적인 섭취와 생활이 기본인 것을 체득하게 됨은 실로 너무 늦은 감이 있다. 들과 산에 동물들이 섭취해야 할 사료가 되는 잡풀들이 참 많이도 무성하게 자람에도 불구하고 동물을 대량 사육해야 하기에 다른 나라의 곡식을 수입해서 가공하여 사료를 사료공장에서 생산하고 있다. 그런데 그 사료를 생사하는 원료들이 우리네 사람들이 사육하던 방식이 아니라 곡물로 사료를 생산해야 하기에 자연 거기에는 걸 맞는 화학제품이 첨가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때문에 우리 한반도의 적합한 동물의 면역성은 미처 대치하지 못한 문제가 재앙으로 다가온 것이다. 라고 전문가들은 설명하고 있다.

우리 문화는 소에 얽혀있는 옛 이야기들이 참으로 많다. 우리네 삶의 형식에는 돼지에 대한 이야기가 적지 않다. 그 외 이솝 이야기라든지 전설이라든지 교훈적인 이야기에 굽이 있는 동물 이야기가 적지 않다.

우리의 육체는 식물성과 동물성이 균형 있게 섭취하게 되어 있다고 선조들은 가르쳐주었다. 아니 식물성이 더 적합하다고 예술적 방면과 종교적 세계에서 그 타당성을 교훈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다량의 동물의 배설물들 때문에 전원적인 농촌을 현실적으로 찾아보기가 쉽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그 많은 동물을 살 처분 하던 공무원들이 정신적인 부담을 안고 괴로워하는 관계로 고통을 받는다는 소식을 듣고 안타까움을 금할 수가 없다. 그 수많은 생명체들이 죽기 싫어서 살려고 몸부림치는 광경에 그 동물을 살 처분하던 공무원들이 고통으로 가위눌리는 아픔을 호소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내용들이 우리의 발전하고자 하는 노력의 결과인가. 그렇다면 인간의 발전이 단순논리로 판단할 문제는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요즘 들어 많이 회자되는 말들이 있다. 공존, 상생, 지구촌, 총체적인 언어들이 자주 쓰이는 표현들이지만 말로써 끝날 것이 아니라 그러한 방향으로 가야 하지 않겠는가? 이와 같은 공감대 형성은 바로 “기본으로 가야 하지 않겠는가?” 라고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