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향의 성리학은 이제현, 이색, 정몽주, 권근에 의해 전승하였고 조선 초기에 식견과 정치수완을 겸비한 정도전이 조선 초기 유학의 기초를 확립한 유학자로 불씨잡변, 심기이편의 대론문을 발표했다. 주자학의 입장에서 불교가 종교 및 도덕상으로 배척하여야 할 이유를 규명함과 동시에 유교진흥이 국가 백년대계의 지상이념임을 역설했다.

조선 문교의 터를 개척한 권근은 사서와 오경의 구결 및 오경천견록 입학도설과 정도전의 심기이편에 주를 단 것 등이 있고 정몽주의 제자 길재는 고려 말에 등제해 벼슬길에 올랐다. 왕조가 바뀌자 사직하고 고향에 내려가 절개를 지키며 후진 양성에 전력해 문하에 김숙자와 그의 아들 김종직이 나와 조선 성리학의 전통을 이었다. 김종직의 문하에 김굉필, 정여창이 유명했는데 무오사화때 김종직과 그의 문인은 모두 화를 입었다. 김굉필의 문하에 김안국, 김정국, 이장곤, 조광조 등이 성리학의 전통을 이어갔다.

조광조가 기묘사화 때 몰락한 이후로는 사류는 정계 진출을 단념하고 산림에 들어가 학문에 전념해 서경덕, 이언적 등을 배출했다. 서경덕의 기일원론은 창의적인 철학의 하나였고 그 주기의 학설은 뒤에 이이의 사상에 큰 영향을 주었고 이언적의 주리의 학설은 뒤에 이황의 사상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황과 이이는 다 같이 학문에 정진해 조선 성리학의 전성기를 인도해 절정기를 이루었다. 서경덕은 기일원론을 주장했고 이황은 이기이원론을 주장했으나 이에 치중했고 이이는 이기일원론을 주장했다. .

이황은 주자의 저서에 대한 훈고해석과 사서언해, 주자서절요, 심경강해 등을 통해 이기심성의 원리를 규명해 주자 철학의 체계를 확립했다. 또 이기를 엄격히 구분해 이는 기에 섞이지 않고 원두처에 있다고 강조했다. 사단은 이지발, 칠정은 기지발론을 주장하고 사칠일원론을 반대하고 호발설을 주장했다. 이른바 이황과 기대승의 학설을 인정하고 보충설명해 이황의 학설에 대립하고 기발이승일도설을 주장했다. 이이 학설의 오점은 이기설 즉, 이의 작용과 기의 작용, 이기의 관계, 이통기국설 등이다. 이통기국에 관해서는 종래 선우들은 논하지 않은 것을 이이 자신이 총체적으로 정리한 독창적인 것이며 여기에서 성리설이 윤리설을 형성해 인심도심설이 나오게 되었다. 이에 이황의 학설을 지지하는 성혼과의 논변은 이황과 이대승과 논란을 방불케 했다. 이이는 선대학자들이 발견하지 못한 바를 많이 언급하며 이황의 학설에 찬성하지 않고 기발이승 이통기국을 논해 이기일원적 이원론을 주장하였다. 이렇듯 이황, 이이 등 여러 학자가 성리학을 연찬한 후로 유교철학은 고도로 발달했고 많은 업적을 이뤄냈다.

국내적으로 유학의 황금기를 이루었고 국외적으로 많은 영향을 주어 우리나라 성리학이 동양 철학사상에 차지한 위치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이렇게 유학의 황금기를 지나서부터는 별 발전을 보지 못하고 당쟁의 소인이 됐다. 이황, 조식의 계류는 대게 동인으로 이이, 성혼의 계류는 대개 서인으로 가담해 학설상의 시비와 정치상의 다른 견해로 대립하게 되고 당파는 정권을 잡으면 내부에서 분열을 일으켜 수백년의 고질로 이어져 왔다. 이때 이황학파의 장현광과 이이학파의 송준길, 김창협이 양파를 절충하거나 타피의 학설에 가담하는 태도는 이례적이라 할 것이다. 그 후 유학은 진로를 바꾸어 예학 중심으로 변해 예송사건을 일으켰고 유자는 거의가 모화사상에 도취해 있었다. 그래서 우리의 실정을 연구하고 경국제민의 학술에 힘쓰자는 실학파가 대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