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진 지역의 소식을 빨리 접하고 싶어 당진시대를 구독하게 됐습니다. 구독 이후 지역 구석구석의 소식에 밝아져서 대화 소재도 다양해 졌죠. 남부 지역에서 살면서 시내권과 북부 지역 소식까지 다양하게 접할 수 있어 매주 재밌게 읽고 있습니다.”

김기원 씨는 6년 전 우강 지역 친목회인 동심회 총무를 맡으면서 당진시대 구독을 시작했다. 사회단체 활동을 하며 지역의 소식을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신문을 통해 당진의 발전 상황과 선출직 의원들의 활동을 파악하고 각종 단체들의 움직이는 상황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김기원 씨는 “월요일에 신문이 도착하면 바빠도 잠시 짬을 내서 신문기사를 확인한다”며 “가끔씩 소개되는 지역의 역사와 유래에 관한 내용들도 재밌게 읽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처음 구독할 때보다 면수가 늘어 보다 상세하게 지역 소식을 파악할 수 있다”며 “당진시로 승격한 만큼 문화와 교육 관련 인프라가 더욱 발전하길 바란다”고 전했다.

김기원 씨는 태어난 집에서 지금까지 살고 있다. 성원리 터주대감인 셈이다. 군대 생활 때문에 객지로 떠난 3년을 제외하고는 마을을 떠나 살아본 적이 없다. 김기원 씨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군 생활을 하던 중 약혼식을 올리고 제대 후 21일 만에 결혼식을 올렸다. 7남매의 막내로 자라 부모님이 연세가 많으셔서 서둘러 결혼식을 올리게 됐다고 한다. 아버지의 소개로 결혼한 아내와 3남매를 낳아 기르며 지금까지 행복하게 살고 있다.

형님들은 도시로 떠나고 홀로 고향에 남아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물려주신 1만평이 넘는 땅을 책임지게 된 것이다. 어린 나이에 큰 살림을 맡아 주변의 걱정도 많았다. 당시에는 기계화가 되지 않았던 터라 일일이 수작업으로 일을 해야했기 때문이다. 모내기가 한창이던 이맘 때면 70~80명의 일꾼들이 함께 일했다. 김기원 씨는 “어려웠던 시절이지만 그래도 지금보다 훨씬 쌀이 귀하던 시절이라 농촌 경제가 나았다”며 “지금은 수익성이 떨어져서 1만평 농사 지어서는 도시근로자 최저임금 수준에도 못 미쳐 농촌에 젊은 사람들이 남아있지 않다”고 말했다.

삽교호 방조제가 생기기 전까지는 예당저수지에서 물을 받아 사용했는데 충분한 양이 공급되지 않아 농사철 물 구하기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고 한다. 밤새 논을 지키며 한바탕 전쟁을 치러야 했다고.

“예전에는 밤이 되면 동네 사랑방에 모여 마을 사람들와 놀던 재미가 있었는데 지금은 통신과 교통이 발달해 사람들이 시내에서 만나죠. 쌀이 귀하던 시절 정미소가 은행과 같은 역할을 했던 때도 있었구요. 지금은 편한 세상이 됐지만 가끔씩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그리움도 느껴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