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TF 인증에 기여해 영주권 및 노동허가 받아

“미국 유학을 준비하고 있던 나는 과학적으로 태권도를 연구해 학문화 하겠다는 꿈이 있었죠. 스포츠 사이언스를 전공할 계획으로 여러 사람들을 만나며 상담에 들어갔고 상담과정 중 영국 웰즈 유도협회 회장이자 스완시 대학 이사장으로 활동 중인 알람 페스브리취를 만나 장학생으로 1982년 29살의 나이에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장학생으로 영국으로 떠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지만 경제적 형편은 그리 부유하지 못했다. 영국에 첫 발을 내딛은 그의 호주머니에는 100불(약10만원)이 전부였다. 그렇게 우여곡절 많은 그의 유럽 인생사가 시작됐다. 영국 남부의 아름다운 중세 마을인 웰즈 외각의 스완시 대학교에서 체육학을 전공하며 태권도를 공부하던 그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태권도 도장 운영을 마음 먹었다. 당시 태권도는 학문적 배경이 따라주지 못해 해외에서는 큰 영향을 미칠 수 없는 시대였다. 하지만 태권도를 연구하고 학문화 하겠다는 꿈이 있었기에 김재두 씨는 맨체스터, 버밍엄, 뉴케슬 등 영국 전역을 돌며 태권도인을 하나로 모았다. 그는 세계태권도연맹(WTF)이 창설된 것을 계기로 영국 UK마셜아트(문화체육관광부)에서 WTF가 인증 받을 수 있도록 각종 정보 및 학문적 근거를 제시했다. 결국 영국 UK마셜아트에서 WTF를 인정했고 김재두 씨는 영국 WTF 초대 기술감독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WTF 초대 기술감독 직책과 함께 김재두 씨는 영국 영주권을 얻었고 학생에게는 주어지지 않는 노동허가도 받아 도장운영을 할 수 있는 자격도 얻게 됐다.

당시 영국 내 한국인 태권도 사범은 단 3명이었지만 각자 태권도에 대한 꿈을 갖고 도장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도장 운영은 쉽지 않았다. 관원들을 모집했지만 IMF를 맞은 영국의 경제상황은 김재두 씨의 생각과는 달리 훨씬 더 심각했다. 도장을 다니는 이들도 생활이 어렵다보니 무료로 운동을 가르칠 수밖에 없었다.

“어려운 시기였지만 WTF를 이끌어 가는 많은 이들이 함께 노력해 5만여 명의 조직체계를 갖출 정도로 WTF를 성장시켰죠. 1989년 6단을 마지막으로 태권도 활동에서 손을 놓게 됐지만 정말 값진 일이었어요.”

태권도인 여행가가 되다

그는 자연스럽게 생활비를 벌기 위한 일을 찾아야 했다. 우리말은 물론이고 영어도 능숙했다. 생활비를 벌 명목으로 가이드며 통역도 했고 조선일보, 동아일보의 특파원으로 지국도 운영했다. 그렇게 간간이 생활비를 벌기 시작했고 여행에 재미를 느낀 그는 1985년 유로스타라는 여행사를 본격적으로 운영하기 시작했다.

영국 런던에서는 블루뱃지라는 자격증을 획득해야 여행사로서 정식 활동을 할 수 있었다. 굳이 자격증이 없어도 가이드로서 활동을 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배움에 대한 욕심은 그를 더 움직이고 노력하게 만들었다. 졸업을 앞둔 학교생활과 논문, 여행사 운영을 병행하며 자격증 취득은 쉽지 않았지만 김재두 씨는 결국 한국인으로는 두 번째로 블루뱃지를 취득하는 일을 벌이고야 말았다.

“1987년 한국사회가 급성장을 하기 시작하면서 많은 여행객들이 늘어나기 시작했죠. 런던을 본사로 그리스, 터키, 마드리드, 스페인, 코펜하겐 등 유럽 전역에 지사를 세우기 시작했어요. 런던 본사에 30여 명의 직원이 근무할 정도로 규모도 커졌고 영향력도 생겼죠.”

이밖에도 조선일보 지국, 부동산, 대한항공 대리점 등 다양한 분야로 발을 넓히기도 했다. 그는 연간 매출 300만불(약324억 원)의 매출을 올리는 여행사로 유로스타를 성장시켰다.

걸프전, 한국 IMF

두 차례 부도와 두 차례 재기

오르막길이 있으면 내리막길이 있다고 했다. 1991년 이라크가 쿠에이트를 침공하면서 걸프전이 터졌고 어째서인지 한국에서 1년간 단체여행객이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경영은 급속도로 악화되었고 본사를 포함한 각 지사와 손을 댔던 사업들이 속속 부도를 맞게 됐다. 37세의 나이에 부도를 맞으며 30억 원 가량의 집도 팔아야 했다. 인생의 첫 고배를 마신 것이다.

하지만 여행가로서 김재두 씨는 인적 네트워크가 충분했고 여행에 대한 지식과 지리를 쉽게 기억하는 장점을 갖추고 있었다. 네비게이션이 없던 시절 지도 없이도 유럽 전역을 가이드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렇게 조금씩 발판을 마련해 유로 탑이라는 두 번째 여행사를 스위스 루체른에 설립해 재기에 성공했다. 카이로에서부터 예루살렘 입성까지 성지순례 가이드를 시작했다. 이밖에도 각종 건축, 음식, 문화 등을 주제로 각종 테마여행을 기획했다.

“많은 테마여행을 기획해 왔고 여행가로서 역할을 다할 정도로 활동했다 생각해요. 실패로 겪는 부담감은 전혀 없었어요. 기획하고 또 기획하면서 그저 여행에 대한 생각만 가득했죠.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정말 여행에 미쳐있었던 것 같아요.”

그렇게 유로 탑을 성공적으로 운영해 1년 만에 500만불(약540억 원)의 매출을 올리는 여행사로 급성장하게 된다. 한국의 씨에프랑스, 삼홍여행사, 롯데여행사 등 대표적인 여행사들이 앞 다투어 거래를 요구할 정도였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1997년. 그의 나이 43세에 한국이 IMF를 맞았고 그가 노력해 쌓아놓은 여행사는 다시 모래성처럼 무너져 버렸다. 주된 거래를 해오던 한국 여행사인 씨에프랑스에서만 어음 600만불을 부도 맞았다. 물론 걸프전 때와 마찬가지로 한국 여행객은 찾아볼 수 없었다.

유로 탑의 운영자이자 가이드로서 모든 책임을 져야만 했다. 런던으로 돌아가 암울한 1년을 보내야만 했다.

그러나 포기 하지 않았다. 그동안 지친 몸과 마음을 위로하고 재충전해 1년 후 유치원생을 비롯해 중·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학원을 운영하며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고 조기유학을 전문으로 하는 여행상품으로 한국 압구정동에 클럽 하이소사이어티라는 여행사를 차려 다시 재기에 성공하게 됐다.

고향 당진에 정착해

새로운 삶의 표지 찾아

“20대에는 세상 모두가 내 것이었죠. 큰 실패를 겪었지만 다시 재기할 수 있는 힘과 아이템은 늘 가지고 있었기에 두렵지 않았습니다.”

실패가 두렵지 않았다는 그는 유럽에 처음 발을 들여 놓았던 때 호주머니의 100불을 생각한다면 잃은 것 없이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고 말한다. 현재는 막내 동생에게 모든 운영권을 넘겨주고 고향인 당진에 돌아와 아내와 함께 식당 늙은 여행가(家)를 운영하고 있다.

김재두 씨는 라이프 스타일러로서 새로운 꿈을 갖고 “인생을 어떻게 가치 있게 살 것인가?”라고 고민하며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고 살아간다. 그는 여행을 통해 얻을 수 있었던 삶의 표지를 새롭게 만들어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고향에 정착하기 전에는 일식을 전문으로 공부했으며 영국 와인 스페셜리스트 인증기관인 WSET에서 레벨3을 취득하고 스페셜리스트 마스터 과정을 밟기도 했다.

18일 저녁부터는 늙은 여행가(家)에 와인샵을 함께 운영해 색다른 음식문화를 이끌어갈 계획이다.

태권도에 이어 여행가로, 라이프 스타일러로 그는 아직도 인생을 여행 중이다.

김창연 기자 kcy8410@nat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