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현대제철이 들어와 천지개벽이 이루어졌다는 송악읍 내도리가 필자의 고향이다. 안 내(內)자에 섬 도(島)자, 내도를 순수한 우리말로 표현하면 안섬이다. 지금도 일에 지칠 때면 조용히 눈을 감고 내 고향 안섬을 회상하곤 한다.

가지고 놀 것이 없었던 어린 시절에는 드넓은 바다가 나의 놀이터였다. 대나무에 줄을 동여매고 적당한 크기의 돌로 추를 메달아 갯벌에서 기어 다니는 민챙이를 미끼삼아 바다에 던지면 망둥어란 놈이 정신없이 물곤 했다. 낚시가 지루해지면 따사해진 바닷가에 배를 깔고 잠을 청하기도 했다. 아산만에 물고기가 얼마나 많았던지 고기잡이 간 배들은 항상 만선이 되어 돌아왔다. 물이 빠진 바다에서는 낚지, 소라, 굴, 바지락, 다양한 해산물들이 사시사철 먹거리를 제공했다.

그 많던 물고기와 철새들은 지금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천국이 따로 없었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곳이 내 고향 안섬이 아니었던가라는 생각이 든다. 저녁노을이 질 때쯤 뒷산인 중봉에 오르면 아산만 너머로 떨어지는 황홀한 석양이 무아지경에 빠트리곤 했다. 붉게 물든 아산만은 황홀 그 자체였다. 나는 그렇게 호연지기(浩然之氣)를 키우며 자랐다.

얼마전까지 우리 고을 당진들판에는 온통 황금색이었다. 올해는 태풍도 없고 날씨가 좋아 대 풍년이란다. 그러나 농민의 마음은 마냥 즐거운 것 같지 않다. 고무줄처럼 늘어나는 빚에 한숨만 나오고, 농사를 지어도 남는 게 없단다. 큰일이다. 한미, 한중 FTA가 현실화돼 우리나라 농업이 사라지면 이 아름다운 관경을 볼 수 없을 것 같다는 두려움도 생긴다. 마치 나의 고향 안섬이 어느 날 갑자기 눈 녹듯 사라지듯이 말이다.

일찍이 서구에서는 농어촌 어메니티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됐다. 어메니티란 인간이 생태, 문화, 역사적 가치를 지닌 환경과 접하면서 느끼는 매력, 쾌적함, 즐거움이나 이러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장소를 말한다. 농어촌의 경우, 맑은 강이나 바다 등 자연환경, 특산품, 토속음식, 그 지방 고유의 축제나 문화, 야생 동식물 등이 어메니티 자원이 될 수 있다.

유럽 국가들의 농촌 마을을 돌아보면, 마치 한 폭의 그림과 같이 아름다운데 그게 바로 이 어메니티운동 덕택이다. 농촌마을마다 도처에 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마을과 시골길이 말끔하게 정리 정돈돼 있는가하면, 농가 처마 밑부터 마당까지 온통 형형색색 꽃 궁궐이다. 각 마을마다 어메니티를 살려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축제가 있고 농어촌사람들도 도시사람들처럼 현대 문명의 혜택을 불편 없이 누리고 있다.

국민소득이 높다고 선진국이 되는 것은 아니다. 삶의 질이 높아야 비로소 선진국이 될 수 있다. 삶의 질은 삶의 환경이 좋아야 높아진다. 그래서 삶의 질은 그 나라의 농촌을 보고 평가하는 경우가 많다. 아무리 국민소득이 높은 나라라고 해도 농어촌이 피폐해져있으면 후진국이요, 좀 못살더라도 농어촌이 깨끗하고 풍요로운 나라가 선진국이다.

그래서 우리도 선진국으로 가려면 농어업과 농어촌을 살리는 데 게을리 하면 안 된다. 국가경쟁력이라는 경제논리적 시각만을 가지고 농어업을 바라보면 자국의 농어업은 쇠퇴할 수밖에 없다. 가격이 싼 식량과 생선을 수입하면 임금인상 압력도 적고 경제적으로 이익을 추구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선진국으로 가기위해 가장 중요한 농어촌의 어메니티를 죽일 수 있다.

우리 농어촌은 우리가 가꿔야할, 결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귀중한 무형자산이고 그 보는 것만으로도 수혜자가 대가를 지불하지 않아도 되는 긍정적 외부효과를 한껏 선사하는 공공재의 성격을 띠고 있다. 농어촌은 먹거리를 공급해주는 생존의 바탕이며, 풍요로운 삶을 보장해주는 삶의 터전이다. 미풍과 양속이 농어촌을 통하여 면면히 이어지고 순박한 인심이 이곳에서 비롯된다.

황금 벼수확이 끝나간다. 개발이라는 명목 하에 고향의 아름다웠던 것들이 하나 둘 사라지고 있는 요즘, 우리 모두 우리 황금들녘만큼은 꼭 지켜 후손에게 물려주자.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농사를 천하의 으뜸으로 삼으며 살아왔다. 그리고 인간이 자연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이 바로 농부와 어부의 마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필자가 느끼는 농부와 어부의 마음에는 정직, 근면, 겸손, 희생, 절제, 사랑, 철학 등 인간이 가져야할 모든 덕목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