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깊이 팬 주름 사이로 눈물이 흘러들었다. 이제는 나아질 법도 한데 이맘때가 되면 여전히 목이 메고 가슴이 아프다. 삶과 죽음, 그 갈림길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아 떨쳐 낼 수 없는 비통함 속에서 60년을 보냈다. 짙푸른 녹음과 함께 다시 잔혹한 달, 6월이 돌아왔다.
걸어서 용산에서 당진까지
김영태 옹이 고향 당진(우두동)을 떠나 서울 용산에서 유학생활을 하던 18살 초여름, 방송 차량들이 거리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며 “전쟁이 발발했으니 휴가 나온 군인들은 모두 복귀하라”는 방송이 다급히 흘러나왔다.
다음날 새벽 2시 경 “쾅”하는 굉음과 함께 어두운 하늘이 번뜩였고, 창문이 깨지고 땅이 진동했다. 한강철교가 폭파된 것이다. 이날 다리를 건너 피난가던 무수한 사람들이 몰살당했다. 악몽의 시작이었다.
아침이 밝자 거리에 탱크가 돌아다녔고, 이대로 있다가는 가족들을 다신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포에서 나룻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 영등포로 갔다. 거리에서 쪽잠을 자며 영등포에서 수원, 평택, 예산, 우강을 지나 당진까지 걸었다.
“꼬박 이틀이 걸렸어. 무슨 정신으로 왔는지… 가족들 생각만 했던 것 같아.”
그렇게 고향으로 돌아와 스무 살이 되던 해 육군 소위로 지원해 입대했다. 7남매 중 장남이었던 그를 전쟁터로 보내던 어머니는 차마 아들을 붙잡지 못했다. 그저 “무사히 잘 다녀오라”는 말 뿐이었다.
포로에서 도망치다
전장으로 떠난 김 씨가 일선에서 전투를 벌였던 곳은 철원평야 일대, 화천이었다. 총탄이 오가고 수류탄과 지뢰가 곳곳에서 터지던 전쟁터의 모습은 영화 속 장면 그 이상이었단다. 시신은 널브러져 있고, 온 몸 조각조각이 날아가 흩어져 있었다. 더 비극적인 건, 총탄이 오가는 전장에서는 죽은 전우의 몸을 방패 삼아 전투를 이어가야만 했던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소대원 40명을 이끌고 철원평야를 사수하기 위해 중공군과 싸움을 벌이던 중 “쾅”하는 폭발음과 함께 정신을 잃었다. 수류탄 파편에 맞아 머리와 다리에 부상을 입고 깨어나니 중공군 포로가 돼 있었다. 한국말을 썩 잘하는 조선족 중공군이 날이 밝기 전 중국으로 가자고 해 다른 포로들과 따라 나섰다. 그런데 여기서 따라가면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옆으로 보이는 산비탈로 몸을 던져 데굴데굴 굴렀다. 부상당한 몸으로 도망쳐 간신히 국군 진지에 다다랐고, 울산으로 넘어와 치료를 받은 뒤 병가를 얻어 당진에 왔다. 새벽녘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어머니가 맨발로 뛰쳐나왔다. 어머니는 아들을 안고 그저 울기만 했다.
“나를 포함해 당진에서 4명이 함께 임관했는데 다 죽고 살아 돌아온 사람은 나 밖에 없었어. 차마 그 친구들의 부모 얼굴을 볼 수가 없겠더라고. 내가 여태 살아 있는 게 다 그들 때문인 것 같아.”
다신 일어나선 안될 전쟁
1953년 7월 휴전이 된 이후 그는 11년 동안 육군 소위로 복무했다. 고대·면천·석문·순성면장을 거쳐 농지개량조합(현 한국농어촌공사)과 당진축협 조합장을 차례로 지낸 뒤 은퇴한 그는 어느새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됐다.
사회활동을 하며 겪은 다른 일들은 이제 기억이 가물가물해져 가지만 그 참혹한 날들의 기억은 잊을 수가 없다. 김영태 옹은 여전히 그날의 날짜와 장소, 시간까지 정확히 기억한다.
그는 “전쟁터에서 후퇴하느라 정신이 없어 죽은 병사의 시신을 데리고 오지 못한 게 지금까지 한이 된다”며 “매년 6월 참전비에 새겨진 이름을 하나하나 마음에 되새길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면서 붉어진 눈시울을 훔쳐냈다.
“비극도 이런 비극이 없어. 정치적 이념과 하등 상관없이 군대에 끌려가고, 죽거나 다친 사람이 너무 많았지. 요즘 북한과 관계가 계속 악화되는 걸 보면 기가 막힐 노릇이야. 전쟁은 절대로 다시 일어나선 안 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