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운전을 하다가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캠페인에 귀를 기울였다. 그 캠페인 내용은 이렇다. 천진난만한 아이들 몇 명이 자랑하듯이 차례대로 말을 이어가기 시작한다.
“우리 엄마는 나를 사랑합니다. 우리 아빠는 나를 사랑합니다.” 여기까지는 마음이 따듯했다.
자랑하는 아이들의 목소리도 경쾌하고 맑았다. 그러나 그 다음 말에 마음이 먹먹해 졌다. 조건이 붙은 것이다.
“우리 엄마는 나를 사랑합니다. 그런데 심부름을 잘 할 때 만요.” “우리 아빠는 나를 사랑합니다.
그런데 공부를 잘 할 때 만요.” 조건을 이야기하는 아이들의 목소리도 힘없이 들려왔다.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캠페인은 짧았지만 그 여운은 오랫동안 가슴 속에 남았다.
순간 이유를 알았다. 필자가 그렇게 조건을 붙이며 자녀들과 거래를(?)했던 당사자기 때문이다.
내 이야기를 라디오에서 하고 있었던 것이다. 부끄러웠다. 물론 세상의 모든 부모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자녀를 사랑하되 무조건 사랑하는 부모도 계신다. 그러나 라디오에서 캠페인을 할 정도라면 자녀들과 거래(?)하는 부모들이 상당하다는 것을 짐작하게 만든다.
그 만큼 동지(?)가 많다는 것이다. 사실 자녀와 부모 사이에서만 이런 조건이 오고 가는 것은 아니다.
사회전반에 좋지 못한 조건이 판을 치고 있다. 바로 학연, 지연, 혈연이라는 조건이다. 우리나라처럼 학연, 지연, 혈연이 강한 나라도 드물 것이다.
최근에 일어난 세월호 사건이 그 결정체라고 본다. 돈이 된다면 법을 어겨서라도 배를 개조한다. 돈이 된다면 적량을 초과해서라도 화물을 싣는다.
적발이 되더라도 특별한 조치가 취해지지 않는다. 다 얽히고 설켜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결과는 너무도 처참했다.
거두절미하고. ‘무슨 일을 하던지 조건 없이 바르게 살 수는 없을까?’라는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해답을 성경에서 찾았다. 누가복음에는 잘 알려진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가 있다. 길 가다가 강도를 만나 가진 것을 빼앗기고 크게 다쳐 쓰러진 사람을 근처를 지나던 사마리아인이 치료해주고, 주막으로 데려가 주인에게 치료비와 숙박비, 여비를 맡기며 돌봐 달라고 부탁하는 내용이다.
선한 사마리아인과 강도를 만난 사람은 서로 아는 사이도, 어떠한 인연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사마리아인은 조건 없이 관심을 갖고 그를 돌봐주고 사라진다. ‘사마리아인의 선행’은 조건 없이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다라는 것을 보여 준 대표적 사례다.
세월호 사건으로 아파하는 유가족들을 위해 전 국민이 아파하고 위로하는 우리의 이웃을 보면서 희망을 보았다. 이 희망의 불씨를 우리가정에서부터 시작하면 어떨까? “우리 아빠, 엄마는 나를 사랑해요.
아무런 조건없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