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우지 말고 살아라 /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 / 그늘 좋고 풍경 좋은데 / 의자 몇 개 내 놓는 거여”

이정록 시인의 시 중에는 어머니의 말씀을 받아 적은 것 같은 시들이 여러 편 있다. ‘의자’도 그런 시 가운데 하나다. 어머니의 바람은 소박하다. 그늘 좋고 풍경 좋은 데 의자 몇 개 내놓는 일, 그게 사는 거란다. 그러니 싸우지 말란다.

시골 생활은 결코 낭만적이지 않다. 마을에 남아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대개 칠순을 넘긴 노인들이다. 순전히 몸으로 때워야 하는 농사일은 그들의 뼈마디를 묵은 사과나무처럼 뒤틀리게 만든다. 밭 매는 할머니 엉덩이에 매달린 스티로폼 의자를 본 적이 있다. 가볍고 푹신해서 의자로 딱 맞춤이다. 따로 앉을 자리를 찾지 않아도 되니 더없이 고마운 도구다. 종일 한몸으로 지내다시피 하는 스티로폼 의자가 할머니에겐 진짜 ‘의子’다. 그 의자처럼 할머니는 자식들의 의자가 되고, 그 헌신을 받침으로 자식들은 성장한다. ‘산다는 건 세상에 의자 몇 개 내놓는 일'이라고 아무렇지 않게 말씀하시지만 그 속엔 뼈마디를 휘게 한 헌신의 생이 있다. 우리의 어머니들은 평생 자신을 의자로 내어주고 그것이 전부인 양 살았다.

의자는 단순한 가구가 아니다. 피터지게 싸워서 획득해야 하는 권력의 상징이기도 하다. 어느 모임 어느 장소에 가든 의자는 있다. 누구도 그 의자에 대한 의식에서 자유롭지 않다. 유난히 의자에 민감한 장소일 때 의자의 위계질서는 더욱 분명해진다. 거기선 인간이 의자로 보인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아니라 의자와 의자의 관계가 형성된다. 의자의 권력에 둔감한 사람은 필경 내로라하는 한자리를 차지하기 어려울 것이다. 사람들은 날마다 그 의자를 차지하기 위해 총성 없는 전쟁을 벌인다. 그 승패 여부에 따라 세상은 인생의 성공과 실패를 가른다.

내가 꿈꾸는 의자는 어떤 것일까. 권력을 탐하기엔 나는 태생적으로 비정치적이다. 계산에 어두우니 부자가 되기도 힘들다. 재주가 미천하니 이름을 떨칠 일도 없다. 변방을 향한 세상의 인심은 냉정하다. 나는 한껏 초연한 체 하지만 받아들임의 미학으로 포장한 것일 따름이다.

크게 억울할 건 없다. 높은 자리라고 평생이 보장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의자만큼 부침이 심하고 허망한 자리가 있을까. 거기 목숨 걸다 추풍낙엽처럼 스러져간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어쩌면 세상을 떠받치는 진짜 의자의 실체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인지 모른다. 진정한 의자란 자기 안에 굳건한 중심 그 자체이고, 무한 나눔이 가능한, 그래서 더 많은 사람 속에서 발효되는 어머니의 덕성 같은 것이 아닐까.

의자가 지닌 다의적 상징을 생각하다 문득 내 의자를 돌아본다. 비록 그늘 좋고 풍경 좋은 곳은 아니지만 의자가 되어 나를 받쳐준 고마운 사람들. 이젠 내가 나의 한쪽을 그들에게 의자로 내어줄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