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딸이 그런다. 자기 아빠는 퇴직 후에도 노인정에서 인기 있는 할아버지일 거라고. 그래서 걱정이 없단다. 무슨 걱정을 말하는지 모르겠으나 좀 전에 아파트 주차장에서 만난 동네 어른들을 보고 하는 말일 게다.

초면의 할아버지 두 분과 낯이 익은 할머니 여러분이 노인정에서 나오셨다. 학생들이 수업을 마치고 하교(下校)를 하듯 그네들도 단체로 하정(下亭)을 했다. 잠시 어린 학생들을 보는 착각이 일만큼 어른들의 하정이 신선하게 비쳤다. 무리 속에서 할아버지 한 분이 주차장으로 방향을 바꿨다. 언제나 그랬다는 듯 할머니 모두가 할아버지를 뒤따랐다.

만면에 자신감 넘치는 표정의 할아버지는 자가용 운전석에 몸을 실었다. 들리지는 않았지만 할머니들이 ‘see you again 오빠’라는 듯했다. 창문 밖으로 얼굴 내민 할아버지로부터 아카시아 향기 같은 소년의 미소가 흩날렸다. 그사이 뚜벅이 할아버지는 모두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아빠가 노인정에 가면 어떤 근거로 인기가 많을 것이냐고 물었다.

요즘 노인정 할아버지의 인기는 퇴직 후에 받는 연금과 운전 능력에 비례한단다. 내가 얼른 이해하지 못하자 큰딸은 설명을 덧붙였다. 연금을 받아서 돈 쓰는데 주저하지 않는 할아버지와 운전을 잘해서 기동력 있는 할아버지가 노인정 인기 남이란다. 이런 분을 요즘말로 노빠(노인정 오빠)란다. 자기 아빠는 교직원연금 받지, 돈 잘 쓰지, 운전 잘하지 그러니 당연히 노빠가 아니냐는 것이다. 그럴 듯 했다. 늙어서 오갈 데 없는 남편보다는 낫지 싶어 그냥 웃어 넘겼다.

저녁상을 물리고 TV를 켰다. 뉴스 앵커가 졸혼(卒婚)에 대한 설문결과를 읽었다. 결혼정보회사가 미혼남녀에게 졸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단다. 57%가 이 문화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듣다가 생각하니 늘그막에 얼굴도 모르는 할머니들한테 퇴직금은 물론 덤으로 남편까지 내주게 생겼지 뭔가. 내가 그 퇴직금을 받도록 뒷바라지 한 공은 어디서 찾아야 할까.

졸혼(卒婚), 한겨울 통가리에 들어앉아 야금야금 고구마 갈아먹는 쥐처럼 내 심사를 깔짝이는 이 말은 도대체 어디서 왔단 말인가. 인터넷을 뒤적였다. 일본에서 들어온 말이다. 유명 방송인 시미즈 아키라(61)가 2013년에 선언해 화제가 된 말이다. 인도에서는 졸혼과 비슷한 의미의 해혼 문화가 있다. 인도의 성인 간디는 37세에 해혼식(解婚式)을 성대하게 했고 우리나라 함석헌 선생의 스승인 다석 유영모 선생님은 51세에 해혼(解婚)을 선언했다. 그런 후 부인의 생활에 일체 간섭하지 않고 오누이처럼 오순도순 지내며 91세까지 사셨다고 한다.

졸혼(卒婚)과 해혼(解婚)은 이혼(離婚)과는 엄연히 다른 문화다. 미움, 원망, 불화를 근간으로 결혼을 해지하는 것이 이혼이라면 졸혼 또는 해혼은 이와 다르다. 때에 따라 같은 공간과 다른 공간에서 살아가되 혼인이라는 의무와 권리에서만 자유로운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과거의 혼인문화는 자연 졸혼이 가능했던 시대의 산물이다. 20대에 결혼을 하여 약 40년 동안만 살면 검은머리는 파뿌리로 변한다. 환갑을 전후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죽음이 서로를 갈라놓았다. 하지만 100세 시대에 진입한 오늘날은 20대에 결혼하면 80년 동안 혼인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그뿐인가. 인생은 환갑부터라는 말에 걸맞게 60대의 외모에서는 늙음보다는 청춘을 읽을 수 있다. 그러니 이혼과 다른 졸혼은 마땅히 이 시대의 요구이지 싶다.

50대 초중반 친구들에게 졸혼이나 해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으니 대부분이 ‘그것 참 좋은 문화’라며 무릎을 친다. 어떤 사람은 심지어 그것 좀 해보고 싶어서라도 아이들을 빨리 독립시키겠다고 한다. 나 또한 남편은 지금처럼 가정에 충실하고 나에게만 졸혼의 자유를 준다면 좋은 문화지 싶다.

함께 TV를 시청하던 큰딸이 그런다. 자기 아빠는 미래의 노빠일 확률이 높기 때문에 노인정 할머니들로부터 도라지나 두릅 등 몸에 좋은 식재료를 받아올지 모른단다. 엄마는 지금부터 맛깔나게 만드는 연습이라도 해두란다. 질투나 짜증을 부리면 졸혼의 대상으로 직행할지 모르니 마음의 준비는 필수란다. 졸혼이 남의 말일 때는 고개를 끄덕였는데 막상 내 가정으로 들어오니 부아가 치민다.

내가 바보인가. 남편이 그렇게 나오면 나도 물좋은 노인정에 갈 것이다. 도라지나 두릅나물 맛있게 만들어 내가 다니는 노빠에게 드리는 것으로 복수해야지. 이런 상상을 하다가 자연 졸혼으로 밀려가는 것이 아닌가 살짝 걱정이 앞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