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자주 << 1919년 3월 1일, 한반도 전역에 울려 퍼진 대한독립만세! 올해는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해다. 서울 탑골공원에서 울려 퍼진 독립만세의 함성은 전국으로 확산됐고, 당진에서도 면천공립보통학교 3.10학생독립만세운동과 대호지·천의장터 4.4독립만세운동이 이어졌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5회에 걸쳐 김남석 호서고등학교 교사의 글을 연재한다.

“터졌구나, 터졌구나, 대한독립성(聲) / 십년을 참고 참아 인제 터졌네 / 피도 조선, 뼈도 조선, 이 피 이 뼈는 / 살아 조선, 죽어 조선, 조선 것이었다.”

원용은이 강선필에게서 받았다고 전해지는 ‘독립의 노래’다. 만세운동 당시에 불리어진 이 노래의 곡조를 확인할 수 없지만, 노래의 흐름과 박자가 스코틀랜드 민요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 석별)’과 일치한다. 원용은은 이 노랫말을 등사해 전교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독립만세를 외치고 노래를 부르며 시가행진을 했다고 전해진다.

원용은의 연설, 이종원의 지휘

1919년 3월 10일 오후, 면천공립보통학교(현 면천초등학교) 150여 명의 전교생은 면천면 성상리 면천향교 바로 위에 있는 ‘송림’에 집결했다. 이 때 4학년 학생이던 원용은은 태극기를 높이 들고 독립만세를 부르자고 역설했다. 원용은은 고종의 장례식에 참여하기 위해 서울에 올라갔다가 3.1운동을 목격하고 귀향한 뒤였다. 그는 친구인 박창신과 시위를 계획해 이날 실행에 옮긴 것이다.

반장인 이종원은 선두에서 시위를 이끌었고, 부반장인 박성은은 시위대의 뒤에서 이탈자를 막았다. 시위대는 면천 동문을 거쳐 학교 앞을 지나 훈도(교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면천 경찰주재소(현 면천치안센터)까지 진출했다. 하지만 위험을 감지한 훈도의 거듭된 제지로 시위대는 결국 해산되고 말았다.

만세운동에 영향을 준 강선필

면천공립보통학교 3.10독립만세운동(이하 3.10만세운동)의 중심인물로 모두 5명이 주목된다. 그 중 강선필(1898~1976)은 만세운동의 배후인물이다. 면천공립보통학교 4회로 수석 졸업한 뒤 경성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등학교)에 입학했는데, 3.1운동 당시 3학년이었다고 한다. 상록수를 저술한 심훈(1901~1936)과 예산군 신양면 출신의 박헌영(1900~1955)이 4학년으로 3.1운동에 참여했으니 비슷한 또래다.

강선필은 서울 3.1운동에 참여한 뒤 고향인 순성면 성북리에 귀향했다. 이 때 원용은에게 ‘독립의 노래’를 전달했을 가능성이 높다. 강선필은 이후 경찰에 체포됐고,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한편 강선필은 이곳에 동족마을을 형성하고 있던 진주강씨 관서공파의 후손이다. 그는 순성면에서 가장 부유했으며, 순성과 당진지역의 대표적인 인물로 활동했다. 1932년 7월에 개교한 순성초등학교도 강선필이 주도해 설립한 학교였다.

3,10만세운동의 주축인물

원용은(1902~1951)은 순성면 성북리 유동마을에 세거지를 형성하고 있던 원주원씨 시중공계의 후손이다. 그의 집은 현재 아미미술관이 있는 자리였다. 아버지 원형상(1869~1913)은 정3품 통정대부 육군 정위를 지냈다. 그는 대한제국 무관학교를 졸업하고 군부에서 근무하다가 1907년 군대해산 이후 비분강개해 낙향했다.

원용은이 3.10만세운동을 일으킨 것은 아버지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원용은은 만세운동 이후 상급학교로 진학이 좌절됐지만, 사법서사 활동을 하면서 자손을 성장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박창신(1900~1950)은 합덕읍 신석리 상흑마을에서 살았다. 밀양박씨 집의공파 후손이다. 아버지 박성수가 매우 근면해 부자가 됐고, 박창신은 경제력을 바탕으로 다양한 민족운동을 전개했다. 특히 그는 당진지역 신간회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이종원(1899~1985)은 순성면 본리 출신으로 경주이씨 석탄공파의 후손이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관직생활을 했다. 그는 학교에서 줄곧 1등을 했고, 반장으로서 만세운동을 선도했다. 그는 만세운동 이후 학업에 매진해 서울사범학교를 졸업했고, 해방 후 당진여고 교장으로 퇴임했다. 그는 만세운동의 내용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의 기록이 없었다면 3.10만세운동은 단편적인 구전으로만 남았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박성은(1899~1942)은 신평면 운정리에 동족마을을 형성한 밀양박씨 김제공파의 후손이다. 그의 집안도 매우 부유했다고 전해진다. 박성은은 3.10만세운동 이후 만주지역을 전전하며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이상 5명의 공통점은 여유로운 경제 환경을 바탕으로 동족마을을 형성하고 있는 집안의 학생들로, 일본의 침략과 대한제국의 멸망을 뼈저린 울분으로 가슴에 담아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뿌리 깊은 가문의 전통과 근대 민족의식은 이들로 하여금 만세운동을 일으키게 한 근본적인 배경이 되었다.

전국 최초의 학생만세운동

3.10만세운동의 역사적 의미는 첫째, 전국 최초의 보통학교 학생만세운동이라는 사실이다. 서울과 같은 대도시의 경우를 살펴보아도, 보통학교 학생들이 직접 운동을 계획하고 전개한 사례는 결코 흔치 않다.

둘째, ‘독립의 노래’를 인쇄했고, 대형 태극기를 제작했다는 점에서 매우 치밀하게 준비했다. 셋째, 당진공립보통학교와 함께 연합운동을 시도했다. 넷째, 일본 경찰 주재소 앞에서도 당당하게 ‘독립만세’을 외침으로써 독립의 결기를 유감없이 보여줬다. 면천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은 참으로 위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