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당진시대방송미디어협동조합은 지난해 당진시가 추진한 당진포구문화구술사연구용역을 맡아 진행했다. 이 연구는 포구 일대의 주민들을 인터뷰해 당진지역 포구의 주민 생활문화가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를 기록하고 연구한 것이다. 본지는 연구용역보고서의 주요 내용을 독자들의 이해를 돕는 정도에서 최소한으로 편집해 매주 연재한다. 우현선은 책임연구원으로 이번 연구용역을 이끌었다.
‘썩어도 준치’란 말이 있다. 얼마나 맛있는 생선이면, 저런 속담이 다 생겼을까. 준치는 1960년대 전후 맷돌포구의 대표적인 어종이었다. 맷돌포구에서 만난 구술자 대부분은 ‘준치’를 언급하며 그 시절을 추억했다. 50년 전만 해도 아산만 일대는 ‘황금어장’이었다. 리아스식 해안 지형은 많은 어종의 산란지로 안성맞춤이었다.
어획량이 많다 보니 지역 어민 외에도 강화도와 경상북도 등지에서 어선들이 몰려들었다. 당시 어선은 나무로 만든 목선 혹은 풍선이라 부르던 배들이었다. 맷돌포구 앞에 띄운 목선마다 4~5명의 선원들이 쉼 없이 고기를 잡아 올렸다. 바다에서 건져 올린 그물마다 생선이 그득했다. 준치를 비롯해 강다리, 꽃게, 새우, 농어, 민어 등 어종도 다양했다. 밤이면 민어 우는 소리가 포구 근처 집 안까지 새어들곤 했다.
1972년 결성된 신평면어촌계의 초대 어촌계장을 역임한 윤주홍 씨는 당시 맷돌포구를 ‘고기광’이었다고 회상했다.
“옛날에는 여기서 고기 거하게 했어. 강화, 경북까지 다 열로 왔지, 고기 잡으러. (여기 사람들은 다른 데로 잘) 안 나갔지. 아이, 여기 고기가 많은데 어디로 가! 딴 지역에서 다 열로 오는데. 옛날에 숭어, 농어, 꽃게. 그때는 이 앞바다가 황금어장이었거든. 그 시절 맷돌포가 좋았지, 진짜. 배가 한 70~80척이 들어왔어. 전부 외지에서 온 배들이지. 그때 자전거꾼이 70명 가까이 되고 다라장사 아주머니들도 60명은 다 됐어. 농어를 하루에 70~80kg씩 잡았으니까. (농어를 잡아서) 포구에 가면 상인들이 막 서로 싸워. 서로 받아가려고. 그때 다 자연산이지. 양식은 없었으니께. 옛날에 여기 아주 고기광이었어, 황금어장이었지.”
윤 씨가 어촌계장을 맡았던 초창기 신평면어촌계의 계원 수는 70여 명 가량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 어업생활에 종사하지 않았으나 부수리에 오래도록 거주한 주민들의 기억 속에도 1960~70년대 맷돌포구는 신평면의 가장 번성했던 어항으로 남아 있다. 봄이면 강화에서 배가 몰려와 맷돌포구에 막을 치고 살았다. 황어나 강다리, 준치처럼 지금은 구경하기 어려운 생선들이 흔하던 시절이었다.
당진시대방송미디어협동조합 우현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