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센 폭퐁우 개이면 평화가 오나니
하 영 철 합덕읍 운곡리
우리나라 광고계에도 외국의 모델이 등장하고 있다. 저명한 학자들도 끌어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중 미국의 저명한 미래학자 엘빈 토플러는 TV광고에 나와 미래사회는 ‘전자산업이...’ 운운하면서 제품을 PR하고 있다.
이 엘빈 토플러의 저서 “권력이동”이란 책에서 권력의 3요소를 이렇게 소개한다. 첫째 폭력(저품질 권력) 둘째 부(富)(중품질 권력) 세째 지식(고품질 권력).
근래 보도매체에서 대서특필하고 있는 북한의 권력자 김정일의 처 성혜림이가 제3국으로 도피, 망명을 희망한다고 보도되고 있다. 북한 사회는 엘빈 토플러의 “권력이동”에 따르면 첫째에 해당되는 나라로서 있을 수 있다고 믿기 어려운 빅뉴스인 것이다.
영국의 역사학자 악턴도 “모든 권력은 부패한다. 절대궐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라고 그의 저서 '자유의 역사'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의 역사속에 많은 권력자들을 일일이 열거할 수 없으나 근세에도 동서를 막론하고 독재자들이 나타났는데 소련의 레닌, 스탈린, 독일 히틀러, 중국 모택동, 남미의 페론, 스페인의 프랑코, 북한의 김일성등의 권력자들이 대표를 형성했던 것이다.
이들 권력자들 때문에 인류는 얼마나 잔혹한 비극을 겪어야 했던가. 그들은 전쟁을 일으키고 국민들을 탄압하고 인류의 자유를 짓밝고 평화를 파괴하였던 본당들이었던 것이다. 이런 자들은 권력으로 방양무인하였고 오만불손하였으며 폭악무모에 빠져 나라와 국민들을 괴롭혔던 것이다.
독일의 사상가 마르크스는 계급과 착취가 없는 공산주의 사회가 건설되면 모든 사람이 자기 능력대로 일하고 자기 필요대로 취할 수 있는 사회가 실현된다고 주장하였다. 즉 사회의 구성원이 저마다 자기 능력만큼 노동을 하고 자기 필요한 만큼 소비할 수 있는 무계급 자유사회를 건설하는 것이 공산주의의 이상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레닌이 제정러시아의 권력을 장악한 후 불과 70년만에 모든 공산주의 국가는 그 모순에서 인류의 억압된 자유에서 삽시간에 무너져 내렸음을 우리는 다같이 5~6년전에 똑똑하게 목격했던 것이다.
제정러시아의 부패, 그리고 공산주의자들의 부패, 독재자들의 부패, 부패로 정권이 쓰러지고 부패로 나라가 망했던 악순환의 권력이 이동되었던 것이다. 레닌등 공산주의자들은 계급투쟁으로 사회개혁을 믿었으나 우리모두는 계급투쟁이 아니고 자기자신의 투쟁에서 시작하여 사회의 개혁을 시도하고 실천해야 한다고 믿는 것이다.
지금 정부에서 하는 사회개혁과 역사 바로세우기도 이런 맥락에서 저마다의 자기개혁이 앞서야 될것이다. 우리의 몸은 감정을 나타내는 것이다. 행복을 느낄 때 웃음을 짓고, 화가 날 때 얼굴을 찌푸리게 되고, 마음이 슬플 때는 울게되는 것이다. 기쁠 때는 노래와 춤이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이런 것들은 밖으로 드러난 마음의 내적표지들인 것이다. 바른개혁의 초기단계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하영철씨!
40년간의 하영철씨의 인생드라마를 요약하자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겠다. 폭풍이 몰아치니 먹구름이 밀려오고 비가 쏟아져 강물이 범람, 농경지와 가옥이 유실되고, 살아있는 목숨을 건지고자 다시 쟁기를 들고 밝은 햇살이 내려오니 원상복구, 그리고 다시는 재난에서 피하고 더 잘살기위해 준비를 서두르는 삶의 현장, 고난, 짜증, 실의, 그리고 희망, 기쁨, 의욕으로 재충천시키는 삶의 본보기라고 생각했다.
생명 다음으로 소중한 것은 재산이다. 우리는 살기 위하여 의식주가 필요하고 돈이 필요한 것이고 재물이 필요하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요구인 것이다.
하영철씨의 출생지는 송악면이다. 8세때에 합덕으로 이사했다. 큰집에 양자로 갔으나 양부와 생부 모두 돌아가셔서 양모와 생모와 함께 국민학교를 다녔다. 생모는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남의집 살이를 해야했다.
하영철씨가 3학년때 소풍가던 날의 얘기를 적어본다.
“다른 애들은 소풍간다고 밤잠을 설치며 떠들썩 하였는데 나는 마음의 여유도 없었습니다. 보리밥 한덩어리에 소금을 뿌렸고, 5백원을 생모가 손에 쥐어주시던군요. 소풍은 안가고 혼자서 산으로 가 놀다가 집으로 오면서 5백원으로 쌀한말(당시 시세)을 팔아가지고 집에 오니 어머니께서 회초리로 종아리를 치시던군요. 맞는 나도 울고 때리시는 어머님도 펑펑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모자는 가난에 슬퍼울고, 괴로워 울고, 불쌍하게 생각해서 울었던 것이다. 소풍을 함께 가면 5백원으로 군것질을 하여 돈을 없앨것 같아 안갔었다고 한다. 그리고 졸업하자마자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하영철씨는 처음에 목공소에서 잔심부름을 시작으로 10여년간 20여곳의 직종과 직장을 넘나들었다. 낮에는 직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찹쌀떡과 아이스크림 장사로 뛰었다. 19세 때 월급 7천원을 받으면서 생모의 남의 집살이를 끝나게 하였단다. 이때 삶과 돈에 있어 자신이 생겼다는 것이다.
하영철씨는 건축현장에서 막노동을 하면서 어깨너머로 목수, 미장, 조적등 일을 틈틈이 익혀 24세때에 독립하였다. 이웃집의 부엌, 구들, 돼지우리등 일만 있으면 열심히 정성을 다해 남의 눈에 들었다. 지금은 어엿하게 간판을 걸고 집수리센타를 열고 있다.
돈을 얼마나 저축했느냐고 물으니 10년 계획으로 2억원의 보험 및 적금을 2년째 들고 있다고 했다. 살림에는 궁색하지 않게 산다고. 의지와 희망에 가득찬 대답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