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염전이라면 흔히들 천일제염을 떠올리지만, 그것 말고도 자염이란 생산 방식이 하나 더 있다. 자염은 바닷물의 염도를 높인 뒤에 끓여서 소금을 석출하는 방식이다. 화염, 전오염, 육염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천일염은 일제강점기 때 국내에 들어왔으며 그 이전 삼국시대 때부터 우리나라에서 자염을 생산해 온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신평면에도 ‘화염’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70대 이상의 지역주민들 중에는 화염 생산에 참여했거나 목격한 이들이 더러 있다. 신평면지에 따르면 매산리와 금천2리, 운정리에서 화염이 이뤄졌다. 김상래 씨 역시 어린 시절, 집안 어른들과 함께 화염 생산에 참여한 바 있다.
“나도 조금 해봤는데. 불 때서 끓여서. 하얗고 소금발이 잘지. 콩국수 먹으러 가면 소금 주잖아. 그런 소금이 여기서 나왔다고. 소금 궈서 생활했어. 흙을 모아서 물이 최고 만조가 되어도 안 묻히게 만들어 놓는 거여. 순전히 사람 인력으로다. 소하고. 웅덩이를 파. 그리고 주변을 흙을 갈아서 손으로다 흙을 말려. 젓는 거 있어. 흙을 뽀얗게 말려. 조금 때만 하는 거지. 그 안에 구덩이 판대에다가 밑에 솔가지 짚 같은 거 넣고 자연스럽게 이리 나오게 길 내고 웅덩이를 하나 더 만들어놔. 빠작 마른 흙을 그 안에다 쌓는다고. 웅덩이를 메우는 거여. 거기다 물을 넣으면 빠짝 마른 흙이서 더 짠물이 나와. 그렇게 해서 물이 나오면 40 몇도인가 무지하게 짜. 걸러서 나오는 물이. 그놈 갖다가 벌이라고 집을 지어. 그 안이다가 네모지게 철판을 나무에 걸쳐서 붙들어 매여. 말하자면 그게 솥이여. 거기에 물 갖다 넣고 불 때면 하연 소금만 남지.” (김상래 씨)
화염의 생산과정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그는, 당시에 순성과 면천 등지에서 사람들이 소금과 바꿀 곡식을 이고 마을을 찾았던 기억도 꺼내놓았다. 나무가 중요한 연료였던 시절, 장작을 지게에 이고 와서 소금으로 바꿔가는 이들도 있었단다.
소금을 끓이는 가마터인 ‘벌막(벌)’이 운정리에 세 곳이 있었다. 김상래 씨의 선친인 故 김남석 씨의 5형제(김남순, 김남천, 김남철, 김남석, 김남설)가 화염을 제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