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 75주년 기념
당진의 3.1독립운동
대호지 4.4독립만세운동
4.4 대호지 만세운동은 지역민과 애국적인 관이 합심해 애국가까지 직접 작사해 가며 이뤄낸 거사중의 거사였다.
세월이 흐르면서 자꾸 잊혀져가는 이 역사적 사실을 통해 애국.애족의 정신을 잠시나마 돼새겨 보는 일도 뜻깊을 것이다.
고종황제 인산(因山)때에 참례하기 위하여 상경하였던 남주원(南柱元), 이두하(李斗夏), 남계창(南啓昌), 남상식(南相植), 남상락(南相洛) 등 5명의 애국지사들은 3월 1일 파고다공원에서 거사된 3.1독립운동에 참가한 후, 우리 고장에서도 독립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하고 태극기 1매와 독립선언문 1통을 얻어가지고 귀향하였다.
이들은 낙향할 때 일제램프속에 태극기와 독립선언문을 숨겨 왜경의 경계를 뚫고 들어오는데 성공했다. 그때 사용했던 램프는 현재 남선석(南先石)씨 댁에 보관되어 있다가 독립기념관장의 요청으로 현재 독립기념관에 전시 보관되어 있다.
고향에 내려온 이들은 비밀리에 4월 초순, 대대적인 봉기를 계획하고 구체적인 결의에 들어갔다.
1차로 대호지 면직원중심 동지인 민재봉, 강태원, 송재만, 김동운을 비롯한 남주원, 한운석씨들이 독립운동거사의 구체적인 결의에 들어갔고, 2차로는 면장 이인정, 면직원 이대하를 비롯한 지방유지 중심 동지인 이춘옹, 남상집, 김홍균, 홍순국, 백남덕, 남정혁, 홍월성씨 등의 동지를 규합하여 독립운동 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거사 단계로 돌입하였다. 또한 이 독립운동 추진위원회는 거사 일자를 대호지와 정미면 천의 장날인 1919년 4월 4일로 결정하였다.
특히 이인정 면장의 적극적인 도움을 받아 면사무소 서기 김동운, 강태원씨 등은 주민을 규합하기 위해 「도로수선 병목정리의 건」이란 제목의 문서를 작성하여 출포리구장 임용규, 송전리구장 민두훈, 도이리구장 남상현, 사성리구장 박희태, 적서리구장 차영열, 두선리구장 대리 김홍택, 장정리구장 정원우, 마중리구장 남상익 등에게 전달하고 면민들의 참여를 독려했다.
이렇듯 비밀리에 계획되고 준비된 4쪾4 대호지면 봉기는 당일 아침까지도 많은 면민들이 그 사실을 몰랐고, 일본 경찰들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4월 4일 아침이 되자 600여 면민들이 면사무소 광장에 모여들었고 군중 앞에 선 이인정 면장은 “오늘 모임은 도호수선이 목적이 아니고 조선독립을 일으키고자 하는 것이니 이에 찬동하는 분은 정미면 천의시장으로 향하자”는 요지의 연설을 했다. 이에 주민들은 면장의 연설에 환호하며 독립만세를 외친 후 거대한 태극기를 앞세우고 정미면 천의시장으로 향했다. 마침 이날은 대호지와 천의시장 장날로 길가에 있던 많은 인파들이 만세대열에 합세하였고 천의시장에 도착했을 때는 군중의 숫자가 1천여명으로 늘어나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 했다.
이들은 미리 제작한 태극기 400여매와 애국가가 인쇄된 유인물을 배포하고 주민들의 만세운동참여를 적극 유도했다.
천의시장에 모인 1천여 군중은 다시 한번 “대한민국은 자주독립국가임을 만천하에 고한다”는 내용의 결의를 다지고 독립만세를 불렀다.
하지만 이러한 질서정연하고 비폭력 독립운동은 일본경찰이 태극기를 강제로 빼앗으려 하자 폭력사태로 번졌다. 항거하는 군중을 향해 일본경찰이 공포를 발사하자 이들은 천의 일본주재소를 점거하고 일본경찰(니미아, 다가지마)을 무장해제 시켰다. 다급해진 일경은 홍성에 주둔하고 있던 수비대에 연락하여 지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마을 주민들은 일본경찰을 무장해제시키고 수거한 권총쪾엽총 등을 숲속에 감춘 뒤에 무사히 귀가했다.
한편 지원요청을 받은 홍성수비대는 급히 출동하여 운산천을 건너다 차량이 물속으로 빠져버렸다. 이에 일경은 운산면 여미리 이장 이인종에게 구조를 요청했으나 이인종씨의 의도적 늑장구조로 일경이 대호지면에 도착한 것은 다음날인 4월 5일 새벽이었다. 새벽에 도착한 이들은 대호지면 사성리 남병선씨 집에 진을 치고 주동자 검거에 나섰다.
한편 1차 만세운동을 성공적으로 끝낸 마을주민들과 유생들은 송정리 민재봉씨 집에 모여 2차 독립운동을 모의하였으나 강화된 일본경찰의 수비로 인해 불발로 그치고 말았다. 그후 계속되는 일경의 검거바람은 1920년 10월까지 계속되어 무고한 수많은 면민들을 체포, 구금했다.
이로 인해 검거당시 송봉은씨는 사살됐고, 이달준씨 등 2명이 옥사하는 등 수백 명의 면민들이 고초를 겪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