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창포에 자리한 송산면 당산리 당산에서는 1960대까지 당제가 이뤄졌다. 당제의 유래를 정확히 기억하는 주민들은 모두 사망해 알 수 없으나 70세 이후의 주민들에게 어린 시절 당제를 보고 들었던 기억을 들을 수 있었다.
최세묵 씨는 “장동, 고잔, 소미, 당미, 북창이 5형제 동네인데, 2월 초하룻날이면 동네별로 기를 매달고 꽹과리를 치며 마을을 돌았다”며 “고잔이 막내이고 장동이 큰형인데 꽹과리를 치며 형이 동생네 마을에 가서 기를 한 번 흔들면, 동생네가 기를 두 번 흔들어 인사하는 식으로 마을을 한바퀴 돌았다”고 말했다.
최세묵 씨가 기억하는 축창 장승에 대한 기록은 송산면지에도 남아있다. 당제를 지내기 전 해마다 축장 장승을 깎아 세웠다. 동남서에 세웠고 북쪽은 바다여서 동쪽에 같이 세웠다. (중략) 전년도에 세웠던 옆에 계속 세우다보니 즐비하게 장승이 섰었다. 이 장승은 북창 당제와 더불어 없어졌다.
한편 김성권 씨는 당제가 사라지고 난 뒤, 당산의 고목이 베어지면서 마을에 닥친 불운에 대한 이야기를 전했다.
“1955년도까지도 당제가 많이 번성했어. 거기에 대여섯 아름이 되는 참나무가 있었는데 그 나무를 뱃사람들에게 판다고 벤 후로 여러 사람이 죽었대. 나무를 벤 여섯 사람이 2년 안에 죽고 나무 주인도 죽었다는 이야기가 있어. 그 후에 강원도에서 무당이 내려와서 굿을 하지 않으면 이 지역에 큰 환란이 난다고 굿을 했었어.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고 나무를 벤 사람들이 다 죽은 거지. 당제를 위하지 않았다고. 당산리에는 당집 말고도 장승을 여러 가운데 세워놓고 그랬어.” (김성권)
당산리 일대에서 활발히 이뤄졌던 당제를 비롯한 민간신앙은 주로 포구를 드나드는 뱃사람들의 안위와 마을의 안녕을 위해 오래도록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이후 바닷길이 막히면서 포구의 규모가 줄어들고 배들의 왕래가 끊기면서 점차적으로 당제와 같은 민간신앙이 사라졌다.
우현선 작가
